경애의 마음
이런 날이면 마음에도 여름이 찾아온다. 마음의 여름은 때로는 늘어지는 낮잠처럼 무기력한 풍경을, 때로는 번성하는 녹음처럼 짙고 강렬한 풍경을 남긴다.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에는 그런 마음의 여름 풍경이 선명하다.
‘경애는 인턴으로 일하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한 계절 동안 집에 틀어박혔다. 아주 긴 여름이었다. 9평 원룸에 누워 있으면 매미들이 마치 파도처럼 연이어서 쌔-하고 울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겨우 고립감을 떨칠 수 있는.’
아주 오랫동안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늘 곁에 있던 남자가 어느 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경애는 오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 하나로 계절을 보낸다. 몸과 마음의 눈을 감고 창 너머 들려오는 여름의 소리들만을 귓가에 채웠다 흘려보내는 아주 긴 계절을. 어느 날 연락이 통 되지 않는 딸을 보러 온 경애의 엄마는 방구석에 구겨져 있는 딸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보고는 빨래를 시작한다. 일곱 번이나 세탁기를 돌려야 할 정도의 양이었는데도 엄마가 빨래를 멈추지 않은 이유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게 해야 경애가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빨래가 끝나고 경애는 드디어 몸을 일으켜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다. 엉엉 울면서 샤워를 한 후 말개진 얼굴로 나온다. 그녀에게 여름은 마음의 최저점이자 그 마음의 바닥을 아주 서서히 딛고 일어서는 시간의 풍경이다. 시간이 흘러 그녀를 버려두고 갔던 남자가 다시 나타나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고, 회사에서는 그녀를 한직으로만 내몰 때에도 그녀는 먼 베트남의 여름 속으로 달아나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곳에서 경애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 상사와 함께 성과도 없는 영업을 계속하고, 그 상사가 과거의 그녀처럼 긴 여름의 무기력에 빠지자 그럴 수 있다며 반미 샌드위치를 반틈 잘라 건네고, 맑고 활기찬 현지인 직원에게 언니라고 불리며 그들의 삶 언저리로 스며든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여름으로 꼽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봄을 탄다거나 가을을 탄다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여름을 탄다는 말에는 힘겨운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계절을 탄다는 말은 모두 어딘가 아름다운 정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마음이 내 밖을 둘러싼 온도와 습도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분명 섬세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나라는 경계를 지우고 파도를 타듯이 계절을 타고 넘실대는 물결이 되어 보는 일, 풍경이 되어 보는 일.
bgm.라즈베리필드_그저 그런 여름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