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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Aug 18. 2019

시간이 성글게 흘러가도 좋을 날

보건교사 안은영 그리고 피프티 피플

1.

주말에는 시간을 성글게 보낸다. 일요일 저녁쯤 그 시간의 성근 흐름을 돌이켜보면 허무한 마음도 들지만 주말이란 무릇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무할 정도로 시간을 아주 느리게 소모해주어야 비로소 다시 바짝 쪼아 맬만한 마음의 숨구멍들이 열린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이런 작가의 말이 덧붙어 있다. 정세랑 작가에게는 아마도 이 책을 쓰는 일이 주말의 숨구멍이 아니었을까. 글을 쓰다 지쳐 잠시 숨 쉬는 구멍마저 또 다른 글쓰기라는 사실이, 심지어 그 숨 쉬듯 편안하고 재미있게 쓴 글마저 아주 매력적이라는 점이 참 부럽고 낭만적이다.


한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썼다는 이 책은 그래서인지 여러 면에서 통속서사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떠올리게 하는 직설적인 제목부터 그러하다. 빨강머리 앤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은영과 까칠한 성격임에도 어쩐지 자꾸 은영과 자꾸 엮이게 되는 남주인공 인표 사이의 티격태격하는 실랑이는 로맨스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그것이다. 보건교사인 은영에게는 사실 퇴마사라는 비밀 업무가 있고 인표는 우연히도 어마어마한 에너지 장막을 갖고 있어 은영이 인표에게서 에너지를 빌릴 때마다 손을 꼭 잡는다는 달콤한 설정 역시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뻔한 서사가 힘을 얻는 것은 옴니버스 식으로 짜 넣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신선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그 맛이겠거니 하고 한 입 베어 문 햄버거 안에서 뜻밖의 맛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공부는 잘하지만 짝사랑에는 서툰 학생부터 온건한 성품 탓에 교과서 선정을 둘러싼 반목에 힘겨워하는 교사까지 각 에피소드 속 인물들이 전체 서사를 위한 퍼즐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명력과 설득력을 가지고 존재한다.


유정은 자주 스스로를 누군가 버리는 걸 까먹은 채 구겨 놓은 영수증 같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한 번이라도 그렇게 구김살 없이 웃어 보고 싶었다.


짝사랑에 빠져 유령처럼 마음이 온 학교를 떠돌아다니게 되는 유정은 전체 서사의 흐름에서는 아예 없어도 무방할 인물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나면 유정이라는 인물에 대해 한 번 더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통속소설의 서사를 본격소설의 문체로 유려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곳곳에서 빛나 그야말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들 예정이라고 하는데 부디 정세랑 작가의 아름다운 문체를 담아낼 수 있는 연출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2.

이야기 속 모든 인물들에게 조명을 비출 줄 아는 정세랑 작가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된 작품이 있다. <피프티 피플>이다. 사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기 전부터 이 책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뒤늦게 정세랑 작가에 반하여 찾아 읽게 되었다. 제목 그대로 50여명의 인물들 모두가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도 작가는 아주 자신의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밝혀 덧붙여 놓았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을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가 있다. 가장 명확한 연결고리는 서울 근교에 있는 어느 낡은 대형병원과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거나 치료를 받은 적 있다. 또 다른 연결고리는 ‘도마뱀 조프’라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이다. 이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도마뱀 캐릭터에 대한 크고 작은 애정은 마지막 장에서 여러 인물들을 한 장소로 모여들게 만든다. 그 외에도 각 인물들 사이에는 가족, 친구, 동료 관계 등이 얽혀 있어 읽다 보면 정말 나란히 발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느 장에서는 남편을 잃은 가여운 아내였던 인물이 다음 장에서는 딸에게 차가운 엄마로 그려지고 또 다음 장에서는 낯선 전화 한 통에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어른으로 나타나는 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선량하다. 거의 유일하게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임대열인데 걸핏하면 아랫사람들 고막을 터트리는 이비인후과 의사이다. 그런 임대열조차 후배 의사와 간호사에게 이제 당신 끝났다는 말을 듣고는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냅다 던지고 뒤돌아서는 모습에서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연민이 느껴진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악인 역할을 맡고 있는 원어민 교사 맥켄지가 분명 악인임에도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었듯이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정세랑 작가가 사람을, 그리고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슈크림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진 나이 지긋한 의사의 입을 빌려 작가는 우리에게 가만가만히 이런 조언을 전해준다. 힘들겠지만, 가끔 미친 사람이 나타나 돌을 반대로 던져 버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다시금 그 돌을 주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던지고 또 던지며 나아가면 된다고. 고만고만해도 된다고. 때로는 좀 쉬어도 된다고. 그렇지만 옳은 방향으로만 던져 나가면 그 방향들이 모여 다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3.

숨구멍을 열고 의자에 기대 본다. 이 글을 어떻게 끝맺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눈을 들어 잠깐 하늘을 본다. 빼곡한 원룸 건물들 사이에 보이는 손바닥만한 하늘이지만 파랗게 잘 말라 있다. 오늘은 그냥 성글게 마무리 지어 볼까. 좋은 책을 읽었고 서툰 솜씨로나마 누군가에게 전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이 성근 생각과 글들도 엮고 엮다 보면 구멍투성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시간의 그물이 되지 않을까.

  

일요일 내내 침대와 책상을 번갈아 뒹굴거리며 이렇게 가만히 책을 읽고 글이나 쓰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참 게으르고 좋은 일이다. 물론 틈틈이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지만 자그마한 살림살이라 일이랄 것도 없다. <보건교사 은영>의 은영처럼 경쾌하게, <피프티 피플>의 오십 여명의 인물들처럼 조용하지만 끈덕지게 오늘 하루를 내일을 향해 또 던져야 하겠지만, 그 전에 잠깐 한껏 늘어지기부터 해야겠다.




bgm.가을방학_좋은 아침이야, 점심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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