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기예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토끼 Sep 23. 2019

내게는 시원한 아침공기를 당신은 시리다 하는 날

에브리맨

외할머니의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 오늘 아침에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지금 내 식사를 챙겨주고 있는 딸이 몇 번째 딸인지, 저기 저 인사하는 아가씨가 내 손녀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억만 흐려지는 게 아니다. 말을 어떻게 했는지, 팔과 다리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형성하였는지에 대한 기억마저 점차 흐려져 가는 외할머니의 텅 빈 눈을 바라보는 일은 슬픔이라는 단어로 응축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여섯 자식의 생계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시장골목이 카랑카랑 울리도록 손님들을 잡아끌었던 강인한 여성은 그 시장의 변모와 함께 세월 속으로 스러졌다.

늙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잔인한 형태의 이별일지 모른다. 잊을 수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자기 자신과의 이별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 무력하다 못해 아프다. 추상적인 아픔이 아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아픔이다. 장기와 신경과 혈관이 하나둘 망가지고 뼈와 근육과 관절이 닳아 볼품없어진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은 이러한 노년의 허무와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한 남자의 장례식 장면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제는 한 줌 뼈가 된 남자의 생을 풀어 놓는다. 아버지의 보석상에서 고장 난 시계를 모으던 꼬마 시절의 추억부터 하루 종일 파도에 온 몸을 흠뻑 부딪치며 여가를 보내던 젊은 시절의 생생한 감각들, 결혼 생활을 쪼개어 버린 중년의 욕정까지. 이 모든 시간을 지난 남자가 맞이한 노년의 시간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이렇게 아름답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 게 생의 결말이라니. 노인이 되어 얻은 원숙한 지혜라든가 주름져도 사랑스러운 미소 같은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 남자의 결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 모두의 결말일 수 있다. 그래서 아직 노년이란 다음 생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나이임에도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늙고 병드는 일은 지하철에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와 저 건너 노약자석까지의 거리보다 결코 더 먼 일이 아니다. 이모들과 엄마에게는 더욱 가까운 일이고. 만약에 우리 엄마의 기억이 흐려지면, 혼자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면 그 때 엄마는 내게, 나는 엄마에게 여전히 소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언젠가 나도 늙을 것이라는 생각보다 더 두렵고 슬프고 외롭다.

너무 소중하니까.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늙고 병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힘겹다. 엄마의 엄마는 외할머니이지만, 내 엄마는 엄마라서 나는 외할머니가 하루 종일 밥 대신 베지밀만 드시는 것보다 엄마가 속이 안 좋아 어느 한 끼를 거르는 일이 사실 더 걱정스럽다. 명절마다 외갓집 가기를 기다리게 만들었던 외할머니의 탕국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일보다 언젠가 엄마가 감기 걸렸을 때마다 끓여준 생강차를 못 먹게 될 일이 더 서글프다.

아픔은 이상하게도 소중함을 환기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도 생각해 보면 깨물어 아픈 감각이 있어야 소중한 내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에브리맨>의 주인공 역시 자신이 망쳐 버린 관계들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물론 후회는 늘 뒤늦은 것이어서 결국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요일마다 번갈아가며 곁을 지키는 자식들이 있는 우리 외할머니는 좀 더 복이 많은 사람이거나 좀 더 잘 살아온 사람일지 모른다.

"아유 우리 엄마 예뻐라."

추석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이모들이 간만에 말끔히 씻고 입술도 빨갛게 바른 할머니를 아기처럼 끌어안으며 칭찬한다. 할머니가 소중할수록 할머니의 꺼져가는 기억들이 이모들에게는 저미게 아플 것이다. 아픔은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아픔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죽을 만큼 아파 보지 않을 때나 할 수 있는 소리이다. 자신을 잃어가는 할머니의 아픔과 엄마를 잃어가는 이모들의 아픔 앞에 그래서 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오래도록 소중하기를, 우리가 그 소중함으로 인하여 아주 많이 아프더라도 내내 소중하기를 바랄 뿐이다.




bgm.안녕하신가영_숨비소리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이 성글게 흘러가도 좋을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