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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Feb 23. 2020

겨울잠에 든 곰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겨울잠에 든 곰들은 봄이 오기를 꿈꾸며 긴 잠에 든다고 생각했다. 얼어 있던 땅에 촉촉한 흙냄새가 피어오르고 햇살이 굴 깊은 데까지 간지럽게 파고들면, 하암, 하품하며 곰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깨어나 봄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거라고. 하지만 봄이 다가오고 있는 요즘 나는 생각한다. 사실 어느 봄엔가는 곰들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이, 또 다시 시작된 삶의 신호가 노곤하지 않을까. 죽은 듯이 잠 속에 시간을 얼려 두었던 겨울날이 그립지 않을까.


물론 추위를 막아줄 집과 옷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인간의 배부른 공상일지도 모른다. 내 게으름에 대한 범동물적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브런치에 매주 글을 써서 올리겠다던 다짐은 금세 흐려지고, 나는 다짐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낮밤이 바뀐 잠을 청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기에는 그다지 열심히 살지 못해 염치가 없었다. 매일 검색어를 독점하며 무섭게 번져가는 바이러스는 더 없는 칩거의 이유가 되었고, 나는 그냥 한 계절 널브러져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동굴 속의 나날들을 보냈다.


동굴은 때때로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로 이데아론을 명쾌하게 보여주었고, 원효대사는 동굴 속 한 모금 물로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동굴에서 한 일이라고는 책 한 권 읽은 게 고작이었다. 나는 이번 겨울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조금씩 읽어 나갔다. 한 이야기를 읽고 기억이 어렴풋해질 때쯤, 다음 이야기를, 또 다음 이야기를 읽었다. 거기에는 위대한 철학적 사유도 삶을 꿰뚫는 진리도 없었다. 그냥 동그랗게 웅크려 앉은 슬픔이 있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열 개의 짧은 이야기가 묶여 있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어딘가 일관된 태도가 나타난다. 다소 허술해 보이는 등짝을 하고서 괜찮다고 웃어 보이는 그런 태도랄까. 벌써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야, 하고 화자는 입을 연다. 그리고 이제는 다 잊어버렸거나 혹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과거는 그를 잡아먹지 않았다. 삶은 이어졌고, 우리들에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두고 온 삶의 한 지점일 뿐이다. 화자는 어느 긴 밤 침대머리에 앉아 여자친구에게 시시콜콜한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듯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뒤돌아 눕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내고 난 화자의 뒷모습이 슬퍼 보이는 건 그가 두고 온 삶의 지점에 여전히 잊지 못한 게 분명한 상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 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이 책의 여덟 번째 이야기인 <폭풍>의 마지막 문단이다.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그가 들려주는 기억은 오히려 아주 행복하고 평범한 장면이다. 그러나 ’행복했었지‘라는 과거 시제의 긍정문은 때로는 ’행복하지 않아‘라는 현재 시제의 부정문보다 더 깊은 펀치 라인을 그리며 마음에 박힌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아름다울수록 현재에는 더 깊은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 책에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방식은 관찰이다. 나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대신 내 아버지, 어머니, 누나, 이웃집 여인 등 타인의 슬픔을 관찰하고 들려주는 것. 슬픔의 거리두기이다. 상실을 겪은 대상이 내가 아닌 타인이기에 슬픔은 비교적 담담히 묘사될 수 있다. 회상의 방식이 시간이라는 여과지를 통해 비교적 담담히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듯이 말이다.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내게 허락하는 동안 그녀를 곁에 안고, 그곳에 린과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다만 멀리서 지켜본다. 호세의 입술을, 갑작스레 치몰리는 그의 이맛살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여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이 책의 일곱 번째 이야기 <머킨>은 누군가를 관찰하며 끝이 난다. 청각장애가 있는 소년 호세는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상실하였고, 여전히 상실 중에 있다. 그 모습을 함께 멀리서 지켜보는 린은 아버지의 사랑을 상실한 상태에서 성장했으며, 현재는 연인과의 사랑을 상실한 상태이다. 린이 호세의 슬픔을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것과 달리 화자는 “오히려 반대예요. 그건 나를 행복하게 하지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화자가 린의 슬픔을 지켜보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린의 슬픔을 괴로워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고 애틋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건 그가 린의 슬픔을 지켜보며 사실은 오랜 연인을 상실한 자신의 슬픔을 타자화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그’ 혹은 ‘그녀’라는 거울을 통해 관찰하고 설명할 때 슬픔의 거리두기는 이루어진다. 격렬한 감정은 가라앉고 다만 끝내 걸러지지 않는 아련한 상실감이 남아 삶과 함께 한다.


브런치에 올린 지난 글들을 보면 나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슬픔에 대해 거듭 얘기하고 있었다. 어떤 책을 읽든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은 그 안에 있는 슬픔을 채굴하여 내 문장으로 다시 제련하는 일이었다. 딱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뭐 그런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닌데 이토록 슬픔이라는 감정에 예민한 걸 보면 타고난 기질 탓도 있는 것도 같고, 어쩌면 인간은 다 조금씩 슬플 수밖에 없어서이기 때문인 것도 같다.


인간은 다 조금씩 슬픈 존재이다.


며칠 전 드디어 종영을 맞은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 나온 대사이다. 우리는 다 조금씩 슬프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가고, 그래서 아무리 소유하고 기록해도 결국은 우리를 스쳐가는 시간들과 그 시간 속에 존재했던 감정과 관계들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실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 감정은 변하고 흘러간다. 그 상실들로 인해 현명해지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더 어리석어지기도 한다. 어떤 상실은 영영 거리두기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도 내가 계속 슬픔을 채굴하고 제련하며 글을 쓸 것임을 알고 있다. 잃어버린 것을 뒤돌아보지 않는 기쁨의 찬란함보다는 이미 돌아앉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슬픔의 온기가 더 아름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곰이 동굴 속에 웅크려 겨우내 잠을 자듯 때로는 한 계절 슬픔 속에 웅크려 잠드는 마음들이 나는 언제나 가엾고 사랑스럽다.



bgm.모브닝_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나를 눈물짓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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