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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Mar 23. 2020

솜사탕처럼 말랑한 봄날

지구에서 한아뿐

“나도 저렇게 여기에 왔어.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 왔어.”


한 남자가, 아니, 한 외계인이 이렇게 고백한다. 설령 그 외계인이 불 뿜는 오징어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사실은 아주 뻔한 모티프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쓴 돼지를 닮은 아가씨가 나오는 글과도 비슷하다. 이 지구에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그래서 먼 외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어떤 이상적 존재가 나타나 나에게 받아본 적 없는 완전한 사랑을 준다. 먼 우주에서부터 너를 지켜봐왔어, 라고 고백하면서. 캐릭터의 외적인 면은 다르지만 더 친숙하게는 우주급 낭만 츤데레 도민준이 등장하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도 있다. 물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이야기는 훨씬 더 참혹하고, 별그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전형적이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단순히 중간 지점으로만 나타내기에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이야기다. 딱 적당한 온도의 따뜻함이다. 먹기 좋은 온도로 식혔지만 아직도 막 끓여냈을 때의 풍미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아, 역시 정세랑월드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스타 아폴로를 쫓아다니는 팬클럽 회장으로 등장하는 주영의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매우 동의하는 바이며, 부럽게도 작가 정세랑은 (아닌 척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세계는 유기농 설탕 같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주어지는 달콤함이 혀를 행복하게 해주는데 어쩐지 건강도 해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세계다. 충분히 재미와 긴장감을 주는 갈등들이 제공되지만 그 갈등들마저 본질을 놓고 보면 솜방망이처럼 달달하게 녹아내리고 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생각해 보자. 외계인을, 그것도 강력한 녹색 파워를 지닌 외계인을 등장시켰으면 지구 침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더 강력한 다른 외계인 하나 정도는 반대편에 세워서 지지고 볶는 그림을 만들어낼 욕심을 부리는 것이 작가의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주례를 서주러 온 외계인, 지구에 여행 와서 잠시 떡볶이를 먹고 가는 외계인 정도이다. 그리고 그 잠시 잠깐 들른 외계인보다는 머나먼 다른 행성에서 지구와는 전혀 관련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관찰에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얼음으로 된 무당벌레라든가 광합성하는 인간들 같은 외계인 같은 것들 말이다. 이들은 무척 아름답지만 어떤 서사적 갈등도 조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걸 눈치 챈 누군가가 강력한 방해 요소로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눈치 채는 이가 두 명 나온다. 하지만 이들은 몇 페이지도 채 넘어가지 않아 금세 같은 편이 되어 모두 함께 좀 더 행복해지고 중심 서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세상에. 이렇게나 평화로운 이야기라니.


어쩌면 내가 정세랑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이 평화로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인 서사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번번이 평화로우면서도 재미있다. 적당히 뻔한 것들을 적당히 낯설게 조합해낸다. 이 지구별이 인간의 끊임없는 환경파괴로 가파르게 망해가는 중임을 시종일관 이야기하면서도, 친환경주의자의 가장 사랑스러운 형태를 보여주는 한아와 광물형 외계인의 가장 사랑스러운 형태를 보여주는 경민의 평화로운 러브 스토리를 중심에 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 한 문장 속에는 <지구에서 한아뿐>이 지향하고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 후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세련된 변주랄까.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서 더욱 소망하게 되는 ‘영원히 행복하게’라는 다정한 소망이 담긴 이야기.


봄바람에 취해 밖을 돌아다닐 수만은 없는 올 봄에도, 그 소망은 여전히 모두에게 유효할 것이다. 어떤 사랑은 2만 광년을 넘어 온다는데, 그래, 2미터쯤이야 마음이 넘어오기에 충분한 거리가 아닌가.




bgm.박지윤_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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