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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Sep 11. 2020

어디든 이유 없이 실컷 헤매며 걷고 싶은 날

Wild

나에게는 유구한 길치의 역사가 있다. 처음 어딘가를 찾아갈 때는 여지없이 헤매고, 다시 찾아갈 때도 똑같이 헤맨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오거리 인근의 아파트단지에 살았는데 십 년을 넘게 살아도 그 오거리에만 당도하면 방향이 헷갈려 엉뚱한 쪽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다 늘 지각을 면치 못하고는 했다. 다행히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각종 지도앱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제 시간에 혼자서 어딘가를 찾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진화하였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길을 잃을 것에 대한 염려가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나 길치인 주제에 나는 길을 따라 걷는 일이 좋다. 정확히는 헤매도 되고, 늦어도 되는 길을 걷는 일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대단히 걷기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다. 동네 뒷산과 골목길들을 따라 걷거나 서울숲, 북서울숲, 한강산책로, 성곽길 등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길들을 날씨가 좋을 때마다 어슬렁거리는 정도다.


물론 요즘은 그 어슬렁거림조차 쉽지 않다. 언젠가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날이 오면 정말이지 마음껏 걷고 싶다. 기왕이면 아주 멀리 낯선 길도 걸어보고 싶다. 미처 다 걷지 못한 제주도 올레길도 좋고, 큰마음을 먹는다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좋겠다. 언젠가 한 번은 미국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아주 잠깐이라도 걸어보겠다는 굉장히 소박하지 않은 소망도 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는 길에 대해 알게 된 건 스물아홉 살 때였다. 생일 선물로 <Wild>라는 책을 받게 되었고, 솔직히 ‘그 어떤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리얼 스토리’라는 띠지의 문구를 보는 순간 영 내 취향의 책은 아닐 것만 같아 한동안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다소 무료하고 우울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느 날에 드디어 책장을 펼쳐 보게 되었는데, 어라, 재밌었다. 게다가 감동적이었다. 띠지의 그 소개말은 거짓 광고가 아니었다.


<Wild>는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책은 다소 충동적으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걷게 된 한 여자의 경험담을 담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셰릴 스트레이드. ‘스트레이드(strayed)’는 길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이름이 예고하듯이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겨우 힘겹게 쌓아올려 놓았던 삶에서 이탈하고 만다.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맞는 밤과 허망한 아침이 이어지고, 마약에 중독된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낯설고 긴 길 위에 선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 불리는 4285킬로미터의 길이다. 그녀는 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미국을 종주하는 길이기에 기후와 지형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길은 너무 덥고, 어떤 길은 너무 춥다. 사막을 겨우 지나고 나면 거대한 산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날것의 풍경 속에는 위험한 야생 동물들이 도사리고 있고, 때로는 불쑥 나타난 낯선 행인이 곰이나 방울뱀보다 더 무섭기도 하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진다. ‘몬스터’라고 명명한 거대한 배낭은 어깨를 짓누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끝내 이 길을 걸어낸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500페이지가 넘게 이어지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길을 걷고 나니, 나 역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 대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물론 셰릴이 이 길 위에서 기적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확신에 찬 띠지의 소개말과 달리 셰릴은 결코 함부로 확신에 찬 문장을 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마침내 종착지인 ‘신의 다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만 이제 보이지 않는 진짜 길을 걸어가야 함을 감지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보이지 않는 진짜 길은 훨씬 더 오래 걸어가야 할 것이고, 또 다시 헤매기도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스물아홉의 나 또한 헤매고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과 별일 없는 일상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쭉 완만한 내리막길로만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변함없는 길치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삶의 길 위에서는 길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종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모르겠고, 설령 목적지를 정했다 하더라도 내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되돌아 나오기엔 너무 늦은 건 아닌지 헷갈리기만 한다.


한번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걸어 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 안에는 사실 책 속의 풍경들을 실제로 경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도 눈에 보이는 길을 걸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내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낯선 길 위에서 두 발과 함께 해매고 있는 내 마음에게 좀 틀려도 되고 늦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그래. 길치라도 괜찮아. 중요한 건 여전히 걷고 있다는 거지.





bgm.곽진언_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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