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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May 23. 2021

택배가 없어졌다

지니, 영양제 하나만 배달해줘

아, 드디어 금요일이다. 퇴근 시간에 딱 맞춰 말갛게 갠 하늘은 투명하게 빛나고, 바람은 시원하다. 간만에 저녁이 있는 삶을 만끽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낯선 번호이다.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고객님, 혹시 오늘 oo택배 수령한 거 있으신가요?”


택배기사님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우리 집에 물건을 배달하려고 보니 배달할 물건이 안 보인다고 하신다. 이런, 나는 오늘 도착할 물건이 뭐였는지 얼른 배송조회를 해본다. 하필 해외직구로 주문한 꽤 고가의 영양제였다. 기사님은 자신이 물건을 어디에서 분실한 건지 혹 이미 배달했는데 깜빡하고 배송완료 버튼을 안 눌렀던 건지 알 수가 없어 내게 확인 전화를 거셨다며, 혹시 분실된 거면 개인적으로 배상하겠다는 말과 함께 업무 번호가 아닌 개인 번호까지 알려 주신다.


확인해 보니 다행히 물건은 잘 도착해 있었다. 택배 기사님께 배달 제대로 되었다는 문자를 드리며 나는 생각했다. 사실 평소에 아무 사고 없이 택배가 매번 잘 도착하여 기사님과 통화 한 번 할 일이 없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 아닐까 하고.


해외직구로 산 이 물건은 내 클릭 몇 번으로 저 먼 바다 건너에서 긴긴 여정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일단 세관을 통과하여 중앙물류센터에 모여들었다가 다시 화물차를 타고 각 지점으로 흩어져 택배기사님의 차를 타고 마침내 내 앞에 도착했을 것인데, 그 무수한 탈것들과 손들 사이를 옮겨 다니면서도 분실되지 않는다는 건 거의 지니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땀 한 방울 한 흘리며 온갖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에 결국 수많은 인간 지니들의 땀방울이 이 마법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오늘 지니 하나가 배송완료 버튼을 누르는 걸 깜빡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별 생각 없이 요술램프를 문질러대는 알라딘처럼 일상적으로 이 택배를 받아들었을 것이다. 알라딘은 지니에게 좀 더 고마워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지니를 해방시켜주는 대신 배송료 몇 천 원(심지어 기사님들께 돌아가는 수익은 이 중 몇 백원에 불과하다고 한다)밖에 드릴 수 없는 알라딘이라면 더욱 더.


택배상자를 열어 영양제 한 알을 꺼내 먹어 본다. 이걸 먹고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녀석을 여기까지 오게 해주신 모든 지니님들도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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