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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an 20. 2019

투명하게 얼어붙는다는 말이 어울리는 날

남한산성

대한이다. 절기에 맞추어 부는 찬바람 덕에 미세먼지는 다시 흩어졌다. 오랜만에 창문을 열었더니 맑은 겨울 공기가 훅 하고 불어 온다. 코 끝이 살짝 시린, 겨울다운 추위이다.


이렇게 차갑고 맑은 겨울날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 약 400년 전 꼭 이런 맵싸한 겨울날 성 안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 김훈의 <남한산성>이다. 재작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미 영화를 본 사람도 책으로 다시 읽어보는 재미가 있으리라 감히 생각해본다. 그건 김훈의 문장 때문이다.



김훈의 문장에는 바람이 분다. 냄새가 있다. 김훈의 문장이 사실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러나 취향을 떠나 감탄할 수밖에 없달까. <남한산성>을 읽으며 <칼의 노래>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다시 받았다. <칼의 노래>에서 바닷바람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면 <남한산성>에서는 건조한 겨울 들녘을 스치는 바람 냄새가 짙게 풍긴다. <남한산성> 속 서날쇠가 만든 연장처럼 작가의 손에 꼭 맞게 잘 버려진 문장. 한 단어, 한 문장도 고심 없이 쓰지는 못했을 성 싶다. 오늘날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가득 박힌 문장임에도 관념적이지 않고 도리어 구체적인 것은 그 모든 한자어가 정확히 쓰여야 할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활한 사대부들의 말은 유려하게 오활하고, 투명한 조선의 겨울에 대한 묘사는 투명하게 빛난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고립과 항복의 역사이다. 고립되고 마침내 항복하기까지 최명길과 김상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을 도모하고자 한다. 명길은 성을 나감으로써, 상헌은 성을 지킴으로써. 명길은 ‘상헌은 말은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라고 비난하고, 상헌은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라고 비난한다. 자신의 믿는 바를 위해 명길은 온 사대부들 앞에서 역적의 오욕을 스스로 뒤집어쓰기를 마다 않고, 상헌은 얼음길에 밝은 사공의 죄 없는 목을 베기를 마다 않는다. 


이들 사이엔 부러 명확하지 않은 자리만 골라 밟으며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들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몸을 사리는 영의정 김류와 같은 이도 있고,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의 자세로 성벽에 박힌 돌처럼 억울한 매도 감내하며 자리를 지키는 수어사 이시백과 같은 이도 있고, 뱀 같은 혀와 붓 끝을 놀리는 대신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으로 묵묵히 삶을 지피는 대장장이 서날쇠와 같은 이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와 관련된 또 다른 유명한 텍스트에는 고전 <박씨전>이 있겠다. <박씨전>을 필두로 하여 그 시대에 쓰였던 소설들 속에서 후금의 장수 용골대는 늘 용맹하기보다는 용렬한 자였다. 그러나 김훈의 문장이 그려내는 용골대는 용맹하지도 용렬하지도 않은 자이다. 그저 ‘아껴서 빈틈없이 다져 놓은 성’의 방비를 읽어낼 줄 아는 장수이다. 


김훈은 애국이라는 한 쪽 날뿐인 잣대로 적을 그리지 않는다. 후금의 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인조와는 아주 다른 결을 가진 왕일뿐 악한 왕은 아니다. ‘목소리가 낮고 멀어서’ 알아듣기 힘들뿐 아니라 ‘늘 표정이 없고 말을 아꼈다’고 묘사되는 인조와 달리 칸은 ‘눈매가 날카롭고 광채가 번득였다. 상대를 녹일 듯이 뜨겁게 바라보았다’고 묘사된다. 이들이 이토록 다른 성품으로 통치를 하는 데에는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작용을 했으리라. 칸은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지만,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시킨 신하들의 등에 업혀 왕이 된 인물이다. 뒤돌아보지 않아야만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자와 뒤돌아 보아야만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자의 눈빛과 목소리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자세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남한산성’이라는 한 장소에 집결되어 벌이는 대치의 양상은 마침내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사실은 애초부터 기울어진 판이었을지 모른다. 조정은 그 기울어짐을 따라 서서히 미끄러져 내리고, 성 안의 백성들은 항복을 하느냐고 묻지 않고, 봄 농사를 지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것이 그들 삶의 기울기이기에. 그렇기에 이 소설의 첫 번째 소제목은 ‘눈보라’였으나 마지막 소제목은 ‘성 안의 봄’이다. 계절의 흐름은 유구하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인간사에 개의치 않는다.


구렁에 났는 풀이 봄비에 절로 길어

아는 일 없으니 긔 아니 좋을쏘냐

-이정환, <비가> 중


햇살에 언 강은 녹고, 보슬비에 풀은 절로 긴다. 삶은 이어진다. 남한산성에서 팽팽히 대치하던 명길의 길과 상헌의 길은, 칸과 인조의 길은 흩어지고, 떠났던 백성들은 돌아온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라는 가녀리고 끈질긴 희망과 함께. 



bgm.심규선_아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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