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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Mar 12. 2019

맑고 차가운 바람처럼 나를 들여다 보고 싶은 날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간만의 추위가 미세먼지를 몰고 갔다. 그러고 보면 찬바람이 고마울 때도 있다. 오늘밤은 어쩐지 다시 겨울이 된 것만 같다. 길고 차가운 겨울밤이라 생각하니 이불 밑에서 까먹는 귤과 함께 추리소설을 추천해야만 할 것 같지만 오늘 추천할 책은 심리학 서적이다. 가장 먼저 추리해야 할 건 바로 내 마음일 테니까.


오늘 추천할 책의 제목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이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먼저 내게 추천해줬던 책인데 친구도 나도 마흔이 되려면 아직 좀 남기는 했다. 그러나 이대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될 게 너무도 확실하여 나는 이 책의 제목에 훅 끌렸다. 하지만 이 책은 감성적인 제목처럼 따스한 위로를 건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소 차가운 얼굴로 내 앞에 거울을 내민다. 자, 들여다보라고. 어른인 척했던 아이인 내 자신을.


스스로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내 마음의 바닥에는 늘 영웅이 되고 싶은 소녀가 있었다. 이것을 책에서는 ‘영웅적 사고’라고 하는데, 주로 사춘기 청소년과 청년들이 갖게 되는 사고방식으로 ‘희망하는 수준이 높으며, 우리는 거창한 미지의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 상상하고 추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나를 지켜줄 천사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것을 믿는 어린 아이들의 세계관에서 현실적으로 한 발 나아간 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영원한 청춘이 찬양받는 시대가 되면서 중년, 심지어는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이런 영웅적 사고로 살아갈 위험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평일 저녁을 책임지고 있는 로맨스 드라마만 보아도 그렇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모습에는 언제나 공통된 전제가 있다. 바로 타고난 매력과 후천적 노력의 결합으로 마침내 행복해진다는 것. 모든 드라마의 주인공은 대개 외적으로 아름답거나 때때로 외모는 평범하게 설정되었다 할지라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노력은 처음에는 장애물에 부딪히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결실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우리들 대부분은 남들 눈에 사랑스러울 때보다 사랑스럽지 않을 때가 많으며, 어떤 일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고, 또 어떤 일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자아가 초기에 갖는 불멸과 명성에의 희망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세계에 대한 무지함에 정비례한다. 마찬가지로 중년의 쓰라림과 우울은 유년기의 비현실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쓴 에너지의 양과 비례한다.’



내 안의 영웅이 되고픈 소녀에게 딱 들려주고 싶은 문장이었다. 이 소녀는 아주 오랫동안 노력의 신화를 믿어왔다. 자신의 노력의 에너지가 무한대라고 믿었기에 늘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그래서 지쳤고, 이렇게 쉽게 지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다. 조용하고 깊은 우울감이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안의 소녀에게 오랫동안 꿈과 희망을 주었던 로맨스 드라마를 한 번만 더 까보자. 모든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는 잃어버린 반쪽처럼 딱 맞는 짝이 예비 되어 있다. 물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는 수많은 내외적 갈등에 시달리며 그 과정이 시청자들에게 큰 재미를 주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결론적으로 완벽한 한 쌍이다. 하지만 솔직히 세상에 그런 건 없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천생연분? 신의 존재를 믿는 편이 훨씬 빠를 것 같다.



‘결혼의 혼돈 모델이 주장하듯 인간은 다른 반쪽을 찾는 절반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을 지닌 다면체로 생각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아무리 완벽한 상대와 함께한다 해도 이 세계에서는 다면체 두 개의 모든 면을 한 번에 볼 수 없다.’



내 모든 면을 이해하고 사랑해줄 완벽한 짝이란 애초에 없다니 애통한 일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짝이 없다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도리어 편해진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이 모두 어딘가는 부족하고 잘 맞지 않았던 것은 그 사람들의 탓이 아니라 상대에게 내 마음 속 완벽한 짝의 모습을 투사하고 요구했던 내 자신의 문제였다는 자각은 뼈아프지만 어쩐지 후련해지는 데가 있다. 사실 왕자님을 기다리는 동안 공주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사람이 진짜 내 왕자님인가, 아니면 저 사람이 진짜 내 왕자님인가. 사실 공주는 왕자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왕자도 공주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내 외로움과 부족함을 메워 줄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바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그 외로움과 부족함 자체였다.



‘우리 삶에 등장하는 모든 용은 한때는 아름답고 용감했던 우리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공주일지 모른다. 모든 끔찍한 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힘없는 존재다.’

  


주인공에게 불을 내뿜는 용처럼 내 삶을 태워버릴 것 같던 우울은 사실 내가 나에게 뻗는 구조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좀 내려놓으라고. ‘되고 싶은 나’를 내려놓고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우울은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난 이제 그만 괜찮은 척 하고 그 손을 잡아 주어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시작하며 달콤한 위로를 건네는 책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묘한 위로가 밀려든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온 게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위로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1차 성인기에 머무른 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밤에는 가슴은 답답하고 눈물은 흐르는데 이유를 알지 못해 뜬눈으로 새운다. 당신도 그러하다면 이제 왕자나 공주를 기다리는 날들은 그만 두고 이 책과 함께, 당신 안의 용에게 손을 내밀어 보길 바란다. 끝으로 오늘의 글이 본의 아니게 다소 교훈적인 어투로 가득해졌지만 한 번만 이해해 주시길. 공기가 간만에 이렇게 맑고, 또 오늘은 나도 나에게 또 누군가에게 교훈 하나 정도는 선물해주고 싶은 밤이니까.



bgm.유재하_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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