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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Oct 01. 2022

얼마나 좋을까

주인의 눈길을 기다리던 화분

- 좋은 거 볼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


카톡으로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던 끝에 언니가 툭 던진 한 마디에 괜히 눈물이 났다. 너무 빨리 아빠를 잊고 살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상실감이 덜컥 찾아온다. 한없이 담담해지다가도 한없이 허무해지는 것. 가족과의 이별이란 이런 건가 보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이 쓴 이 유명한 시의 한 구절을 읽으며 늘 내 마음에 와 박혔던 구절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였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음을 불현 듯 깨닫는 순간의 그 찌르르한 감정. 어쩌면 스무 살 이후 내내 그런 감정에 매달려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에 남는 구절은 ‘얼마나 좋을까’이다. 정말이지... 얼마나 좋을까.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당신이 곁에 있다면, 같이 바라볼 수 있다면, 함께 바라본 그 순간을 두고두고 다시 얘기 나눌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들은 이루어진 소망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는다.


아빠가 퇴직하고 나면 유럽여행을 가려고 적금을 붓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엄마를 통해 듣게 되었다. 내가 퇴직 기념으로 유럽에 가자고 했을 때는 비행기 오래 타기 싫다고 가까운 나라로 가자고 하시더니 실은 가고 싶으셨구나. 그 생각을 하니 매일 저녁마다 <세계테마기행>을 보는 아빠의 마른 옆모습이 참 아렸다. 이 세상에는 곳곳마다 문득 마주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참 많았지만 우리는 그걸 보면서 “와! 저기 나중에 코로나 끝나면 꼭 가보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집에 앉아서 공짜로 세계 여행 다 하니까 좋네.”하고 너스레를 떨어볼 뿐이었다.


실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머나먼 땅의 풍경들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빠가 한때 열심히 심고 가꾸었던 정원의 꽃들이 피어나는 풍경만이라도 좀 더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아빠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렇게 좋아하시던 해오라비난초가 가득히 피어난 걸 돌아와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눅눅하게 내리 앉은 여름 하늘을 무사히 지나보내고 저 새파랗게 빛나는 가을 하늘이 창밖에 드리운 걸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떠난 자리에는 이렇게 결코 완성되지 않을 무수한 가정들이 남아 있다.


아빠, 해오라비난초가 피었어


엊그제는 엄마와 이모들을 모시고 가까운 소도시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간 아빠를 두고 집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참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우리는 씩씩하게 웃으며 즐겁게 여행했다. 다만 우연히 찾아간 식당의 칼국수가 맛있어서 뜨끈한 국수 좋아하던 아빠 생각이 났고, 산자락에 위치한 숙소가 어쩐지 어릴 때 가족여행 가던 백암온천 숙소와 비슷해서 아빠 생각이 났고, 솔숲 사이를 걸으며 몇 해 전 겨울에 함께 경주 계림을 걸었던 아빠의 건강하던 모습이 생각이 났을 뿐.


아빠, 지금 아빠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한없이 담담하게, 때로는 한없이 허무하게 이 생각을 한다. 위안이 되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한 날들 중에도 이미 아름다운 것과 마주친 순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함께 삼월의 흙을 뚫고 나오는 첫 번째 봄꽃을 보았던 순간, 나란히 앉아 자두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팔랑거리는 걸 말없이 바라보던 순간, 장대비에 꺾인 수국을 집안에 잔뜩 꽂아두고 흐뭇했던 순간 등등. 


그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 있어 나는 매번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이렇게 아빠에 대한 글을 한 문장 한 문장 이어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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