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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Dec 22. 2022

천 개의 눈이 된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달력에 기록된 이야기

아빠, 눈이 많이 와.


그래서 오늘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쓰는 대신 침대에 걸터 앉아 밖을 내다보며 글을 쓰려고. 아, 내 방에 안 와봐서 모르겠다. 침대를 창가에 두었거든. 책상과 침대 중 뭘 창가에 둘지 고민했는데 그냥 이 쪽이 더 낭만적으로 느껴졌어. 아빠도 알다시피 낭만은 중요하잖아. 아빠도 퍽 낭만적인 사람이었지.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삶이 짜놓은 계획대로 그저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은밀하고 무해한 낭만을 품고 자기 자신만 아는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게 바로 아빠였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기도 해.


그런 아빠 곁으로 내려가 다시 함께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지난 12월. 그 때도 이렇게 눈이 왔던 것 같아. 그리고 아빠는 눈보다 먼 곳으로 떠났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아빠 자신도 몰랐을 거야. 아빠를 더 잘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한 해의 절반이라도 곁에 있다가 가줘서. 그 반 년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눈송이가 점점 굵어져. 하늘에서 하얀 글씨들이 내려오는 것 같아. 무슨 문장들을 들려주려는 걸까. 너무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어. 이렇게 하늘이 해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면 아빠 생각이 나. 아빠 역시 해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우리집 책장에 <천 개의 바람이 된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꽂혀 있었던 거 알아? 아마 아빠도 몰랐을 거 같아. 언니랑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나만 그 책을 발견해 읽은 것 같더라고. 제목으로 짐작했겠지만 죽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엮어둔 책이야. 천 개의 바람이 되었다는 말이 예전에는 그냥 죽음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로만 느껴졌는데 이젠 알겠어. 그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바람이 불 때, 비가 내릴 때, 눈이 쏟아질 때 정말 사라진 아빠가 사라지지 않는 언어가 되어 말을 거는 것 같거든. 아빠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잠시 형상을 갖추고 머물렀다 사라진 모든 그리운 것들이 해독할 수 없는 허공의 문장들이 되어 오는 것 같아. 정말 그런지 어떤지는 내가 그 문장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


지난 3월의 달력


아빠, 내가 매일 자기 전에 달력에 뭔가를 적었던 거 알지? 내 나름의 체크리스트였어. 오늘 아빠가 약을 제때 먹었는지, 영양식품은 뭘 먹었는지, 운동은 했는지, 특별한 이상은 없었는지 다 적어뒀어. 어쩌면 아빠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가장 정직한 기록이지. 아빠가 병과 싸운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고. 3월까지만 해도 산책도 하고 근력 운동도 했던 기록이 있는데 한 장을 넘기기 무섭게 그 기록은 사라져. 씹는 게 힘들어지면서 이런저런 영양식품의 섭취 횟수도 줄어들어. 대신 식사량이 줄면서 더 심해진 변비 때문에 약이 추가되고. 그러다 그 모든 게 7월에서 뚝 끊겨. 모든 이야기가 갑자기 끝이 나.


사실 아빠가 걸린 병이 루게릭이란 걸 알았을 때 이미 이야기의 결말은 나와 있었지. 치료제도 없고 생존기간도 가늠할 수 없는 병. 그런데도 상실은 참 갑작스럽더라. 이렇게 펑펑 쏟아지다가도 어느새 뚝 그쳐서 눈길을 뽀득뽀득 밟아볼 새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눈처럼. 어쩌면 자연은 이렇게 상실을 가르쳐주나봐. 누군가를 잃는 일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일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발밑의 계단이 사라지는 일이란 걸. 아무리 준비해도 준비되지 않는 일이란 걸.


언젠가 글쓰기 모임에서 아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어. 아빠는 내게 배경 같은 사람이었고, 언젠가 아빠가 사라지면 난 배경 없는 사람이 되어 펑펑 울 거라고. 그 때는 내가 썼던 그 문장이 이렇게 빨리 나에게 찾아올 줄 몰랐어. 그리고 배경 없는 사람이 되어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도. 


아빠, 난 눈오리가 된 것 같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는 달력의 공백과 같은 하루하루를 허우적허우적 헤엄치며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있어. 물속으로 가라앉거나 녹아 없어지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바삐 발을 놀려야겠지만 중요한 건 떠가고 있다는 거지. 앞으로, 앞으로. 


그렇게 벌써 한 해의 끝이고, 낭만적이게도,

눈이 와. 펑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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