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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Nov 26. 2022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오래된 한 켤례의 신발

한 사람이 몸에 걸치는 것 중에 가장 그 사람의 삶과 밀접한 건 뭘까. 나는 신발이라고 생각한다. 신발은 그 사람의 가장 아래에서 그 사람의 하루를 모두 받아낸다. 그 사람이 돌아다닌 만큼 정직하게 닳고 더러워지며 냄새가 밴다. 하루의 대부분을 주로 앉아 있는 사람의 신발과 서 있는 사람의 신발과 걷고 뛰어 다니는 사람의 신발은 애초에 종류도 다르고 낡아가는 모양새도 완전히 다르다.


아빠가 가시고 나서 아빠의 옷들은 대부분 정리했다. 신발 중에서도 별로 신지 않은 등산화나 구두 같은 건 다 처분했다. 하지만 아빠가 가장 많이 신었던 신발은 아직도 현관 한편에 놓여 있다. 짙은 남색의 크록스 신발. 아빠가 근무하는 동안 하루 종일 신었었고, 퇴직한 후에는 정원에 나갈 때마다 신었고,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할 때 신었던 신발이다.


-히야, 이거 아직도 안 버렸습니까?


병실을 찾아 온 동료 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었다. 그리고 이 신발에 적어도 아빠의 직장생활 절반은 담겨 있을 거라고 또다시 웃었다. 그 웃음의 뒷맛이 슬펐음을 그 분도 나도 아빠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빠와 똑같은 디자인에 색만 다른 크록스 신발을 신고 있던 동료 분은 흰 병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한때 아빠도 걸치고 있었던 병원 가운이었다. 아빠는 그 병원의 방사선기사셨으니까.


아빠는 아주 오랫동안 그 종합병원에서 일했다. 흔히 사람들이 건강검진 때마다 받는 X-ray검사만 하는 게 아니라 의사들과 함께 수술방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수술 과정에서 정확히 아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기억나는 건 한밤중에도 수술 콜이 오면 자다가 달려가고, 새로운 기계와 기술이 들어올 때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한 전문 서적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언젠가 병원에 잠깐 들렀을 때 무거운 납옷을 입고 나타났던 아빠의 모습이다. 많은 자식들이 그렇듯 그냥 그 정도로만, 아빠가 어렵고 힘들게 돈을 벌어 오시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어렴풋이 안 채 평생을 살았다. 아빠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밖에서 힘들었던 얘기는 더더욱 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퇴직하기 전의, 아니, 아프기 전의 아빠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아마 출근하자마자 불편한 구두를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으며 아침을 시작했을 것이다. 많이 걷거나 뛰지 않으니 운동화까지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고, 신고 벗기 편하면서 오래 서 있느라 발이 부어도 괜찮을 크록스 클로그가 실내화로 적당하셨겠지. 병원의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방사선을 내뿜는 복잡한 기계들을 종일 조작하셨을 것이다.


직장에서 아빠의 인간관계 역시 상상만 해볼 따름이다. 아빠는 동료들 사이의 사적인 이야기를 쉽게 전하는 사람 역시 아니었으니까. 다만 아빠 장례식장 현관을 빼곡하게 메우고도 넘쳤던 그 크록스의 행렬로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은 해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이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절을 할 때마다 가운에 꽂아두었던 펜들이 툭툭 떨어졌고, 펜보다 먼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고 싶었는데 퇴직하고 놀러 한 번 안 오고 이런 모습으로 왔냐고 울며 말했다.


이미 이직하거나 퇴직한 동료 분들도 많이 오셨다. 전 직장 동료인데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신 만큼 더 많이 우셨다. 나보다도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직원 한 분은 너무 펑펑 우느라 현관에 서서 한 동안 들어오지 못했다. 내가 나중에 죽었을 때 그렇게 한참이나 어린 동료가 날 위해 울어줄까? 글쎄. 쉽지 않을 거 같다. 꼰대로나 안 기억되면 다행이지.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아빠의 신발만 집으로 돌아왔다. 문득 아빠가 좋아했던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장그래가 낡고 땀내 나는 슬리퍼를 경쟁상대에게 팔려고 했던 장면이다.


당신에게 사무 현장의 전투화를 팔겠습니다.


이 신발은 아빠의 전투화였고 후배들이 애정과 장난기를 담아 달아 준 지비츠들은 훈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전투화에 담긴 사연을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상상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져 나왔을 이 단순한 신발은 내게 어쩐지 불가해한 얼굴을 하고 있다. 좀 더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나는 어쩐지 이 신발만큼도 아빠를 몰랐던 것 같다. 영영 더는 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오고 나서야 그 사람을 좀 더 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모순이 슬픔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햇빛에 말리려고 내놓자 금세 고양이가 다가와 아직 남은 아빠 냄새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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