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은 언제부터 결과에 휘둘리기 시작했을까? 결과 중심적인 사고가 본격적으로 인류의 삶에 뿌리내린 때는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기계와 자본이 결합해 물건을 훨씬 빠르고 많이 만들어낼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었느냐 보다 얼마나 많이, 빠르게 만들었느냐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고는 20세기에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등장하면서 더 강해졌다. 관리자들은 노동자의 작업 속도를 스톱 워치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가장 효율적인 동작이 측정되면 노동자들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그것만 반복해야 했다. 노동에 숫자가 매겨지기 시작했다.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현재 인류는 모든 것에 숫자를 매기고 있다. 개인의 가치는 재산으로, 예술의 가치는 SNS의 좋아요 수로, 학업 능력은 시험 성적으로 치환된다. 이제 유의미한 숫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행동은 무가치하다. 우리는 미래에도 숫자를 부여한다. 나는 일기예보 앱에서 오늘 오후에 비가 올 확률이 90%라는 점을 확인하고 우산을 챙겨 나간다. 동시에 우리는 희망적이지 않은 미래도 엿볼 수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은 얼마 안 가 소멸할 것이며 기후위기는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고정된 암울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2
다가오는 불변의 절망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대처법은 수용이다. 이는 결론의 재정의를 동반한다. 죽음은 이러한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진 영역이다. 죽음을 누구는 천국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누구는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재정의 했다. 이러한 작업은 인류가 기후위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정모 관장은 '찬란한 멸종'에서 기후위기를 생명의 이어짐으로 재정의한다. 그는 지구에는 여태까지 다섯 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말한다. 삼엽충, 대형 곤충 등이 멸종하면서 공룡이 번성했고, 공룡이 멸종하면서 포유류가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멸종은 새로운 종이 출현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내가 죽어도 이 지구라는 무대에서 연극은 다른 생명을 통해 계속된다.
결론의 재정의는 영화 멜랑콜리아를 연상시킨다. 평소 우울증을 앓던 저스틴은 결혼을 파탄낼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가 언니 클레어의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미지의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행성이 보일 정도로 충돌이 확실해지자 클레어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그녀의 남편은 자살한다. 반면 저스틴은 언니와 달리 차분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조카와 나뭇가지로 원뿔 형태의 구조물을 만든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언니를 데려와 셋이서 손을 잡고 앉는다. 빠르게 날아오는 행성은 결국 지구를 덮쳐 모든 것이 사라지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우울증을 앓던 저스틴에게 행성충돌이라는 결론은 공포가 아닌 해방으로 재정의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성 충돌을 재정의 했다고 해서 그녀가 무기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불안하지 않은 상태로 차분히 우울증을 상징하는 행성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삶은 여전히 무의미했고, 따라서 여전히 무기력했다.
결론의 재정의가 무기력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해선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즉 행동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무기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행동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고, 그것이 고정된 암울한 미래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과정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3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경로가 존재한다.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갈 수도, KTX를 타고 갈 수도, 시드니를 들렀다 갈 수도 있다. 즉 정해진 결론에 과정이 속박될 필요는 없다. 과정은 결과에 상관없이 무한히 자유롭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 점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의 경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같은 죽음에 도달하는 80억 명의 지구인에게는 80억 개의 경로가 존재한다. 개개인은 저마다의 경로를 선택하고 그것은 독특한 인생의 궤적이 된다. 똑같이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아도 남은 시간 동안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무한히 많다. 즉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결과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
나는 무기력에 빠질 때마다 나의 자유를 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기후위기로 인한 인류의 종말이라는 고정된 결과에 나 스스로를 무기력이라는 끈으로 속박시켰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고정된 결론에 나 자신을 얽매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마치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듯이. 하지만 정해진 하나의 결과에 나를 옭아맬 필요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주어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인간은 자유롭도록 단죄받았다.
나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었다. 종말이 예정된 이 세상에서, 나의 자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이냐였다.
'흑선백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에 대한 솔직한 의견(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이나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