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에세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외할머니의 말이 나는 그렇게 좋았다. 성남의 우리 집에서 의정부의 외가까지는 차로 2시간이 걸려 우리 가족은 외가에 자주 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 외가에 가면 자고 오곤 했다. 외가에서 자는 날밤이면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외가의 안방에 있는 나무장롱을 열었다. 까끌까끌한 솜이불들을 거실에 까는 순간부터 나는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웠지만 그래도 신이 났다. 키가 이불의 반 정도밖에 안 되던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이불에 밴 장롱의 나무 향을 맡았다. 다른 친척들이 같이 자는 날이면 나는 더욱 들떠서 거실을 몇 바퀴 뛰었다. 코골이로 악명 높은 아버지와 이모부 그리고 삼촌은 다른 방으로 갔고, 누나와 나, 이모와 외숙모 그리고 사촌 형제들이 거실에서 복닥거렸다. 토요일 밤에는 거실의 텔레비전에서 주말의 명화를 틀어놓고 짝을 지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의 살을 맞대며 우리는 잠이 들었다. 어스름한 새벽,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고개를 돌려보면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차리시는 외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항상 파마머리를 했던 외할머니는 손이 크셨고 음식의 간을 잘 맞추셨다. 거실에서는 외할머니의 자식과 자식들이 각양각색의 자세로 자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손주들은 소파에 앉아있는 외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밥 먹자는 외할머니의 소리가 들리면 누워있던 모두가 일어나 이불을 갰다. 산발한 엄마와 이모와 삼촌들도 이때는 어른이 아닌 외할머니의 어린 자식으로 돌아간 듯했다. 나는 어른들한테 예쁨 받고 싶은 마음에 작은 손으로 거실에 접이식 상다리를 펴 상 위에 쇠수저를 가지런히 놓았다. 식구들은 거실에서 뜨거운 국과 밥을 떠서 후후 불어먹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친척들은 하나둘 외가를 떠났다. 사람이 한 명 한 명 빠져 거실에 빈 곳이 늘어날수록 나는 허전했다. 조금만 더 있자고 버티는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은 친척들을 다 보낸 후 마지막까지 남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집에 가야 한다고 하는 엄마에게 나는 하루만 더 자고 가자고 떼를 썼다. 3대가 한집에서 사는 것을 철부지는 원했던 걸까?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는 시대였건만 나는 그것에 저항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징징거리는 나를 달래며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반찬 통에 듬뿍 담아주고는 주차장에서 우리 가족을 배웅하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허한 마음을 쉬이 붙들지 못했다.
나는 사춘기가 오면서 외가에 가는 것보다 내 방에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나의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외가에서 어른들 틈에서 그들의 지루한 이야기에 "예, 그렇군요" 하면서 맞장구치는 시간이 아까웠다. 외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보다 그냥 집에 빨리 오고 싶었다. 시간이 더 지나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어머니는 나 없이 외가에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생업이 바쁜 나머지 친척들도 예전만큼 자주 외가에 들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생일 때쯤 외할아버지는 치매를 얻어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내가 군대에서 전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 외할아버지는 앉아서 요양사와 대화를 하다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가 얼어있는 땅에 묻히신다며 어머니는 슬퍼하셨다. 혼자가 된 외할머니는 몇 년 후 다리가 약해져 외할아버지가 계셨던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나는 가끔 어머니를 조수석에 태우고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으로 차를 몰았다. 90이 넘은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60대 딸의 희끗희끗한 머리는 윤기 없이 푸석했고, 갈색이 진했던 눈동자는 그 색이 옅어졌다. 외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의 건물은 허름했고 분홍색 벽지에는 유치한 꽃무늬가 반복해서 그려져 있었다. 외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여러 노인과 같은 방을 쓰셨다. 외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같은 두 가지 말을 반복하셨다. 하나는 어디가 아파 죽겠다는 것, 또 하나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푸념을 15분 정도 들은 후 우리는 외가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안 계신 집에 자식과 손주들은 모이지 않았다.
11월의 어느 날 이모가 엄마에게 연락했다. 김장을 외가에 갖다 놨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노모 혼자 무거운 김장을 나르게 할 수 없어 이번에도 내가 동행했다. 어릴 적 2시간 걸리던 길은 새로운 길이 뚫려 1시간으로 줄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잠금장치 버튼을 4번 삑삑 누르자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나와 어머니는 신발 하나 없는 현관을 지나 텅 빈 거실로 들어왔다. 대낮임에도 구름이 가득해 베란다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이 보였지만 집 안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오랜 시간 보일러를 틀지 않아 한기를 머금은 바닥에 발바닥은 시리다 못해 따가웠다. 마지막으로 사용된 게 언제인지 모를 화장실의 세면대와 녹슨 수도꼭지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다. 부엌에는 말라비틀어진 간장과 식초 같은 양념장들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처분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방 벽에는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가 잡을 수 있는 안전 바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를 보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 집 부엌에서 요리했을 외할머니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엷은 먼지가 쌓인 가죽 소파에 앉아 텅 빈 거실을 바라본다. 거실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를 닮았다. 몇 개의 돌기둥과 머리와 팔이 떨어진 조각상만 남은 폐허는 수많은 그리스인이 살았던 공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텅 비어있다. 관광객들은 폐허 구석에 있는 네모난 안내문을 찬찬히 읽고 나서야 이곳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장소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외가의 거실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 휑한 거실을 보고 이곳이 한때 3세대가 복닥거린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 정적만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재잘대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외가의 거실이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와 다른 점은 안내문이 없다는 것이다. 이 공간에 얽힌 역사는 나와 할머니의 혈육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에 따르면 나는 특정한 때의 거실을 그리워하는 것이겠다. 개인에게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가 있듯 하나의 가족에게도 탄생과 노화 그리고 소멸의 과정이 있다. 나는 우리 가족의 활력이 넘쳤을 때, 가장 영광스러웠던 그때의 거실에 연연한다.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어머니도 세월에 스러지지 않아 생기가 가득 찼던 때의 거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친척들이 흩어지지 않던 때의 거실. 사소한 일에도 행복해하던 어린 나의 거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은 나의 기억 속에만 있다.
'흑선백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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