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의 나무, 가평의 돌 그리고 연가
크고 오래된 나무를 보면 뿌리를 생각한다. 그 무성함을 수백 년 동안 떠받쳐온 땅속 깊이 박힌 뿌리. 바람이 불어도, 가지가 꺾여도, 그 근원이 단단한 한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나도 저렇게 뿌리를 내리며 살 수 있을까, 나무 앞에서 종종 그런 생각을 했었다.
뉴질랜드의 나무들은 그 생각을 다시 불러왔다. 뉴질랜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누카 나무가 그랬다. 훼손된 땅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다른 생명이 자랄 수 있게 터를 닦는 나무다.¹
오클랜드의 도브 마이어 로빈슨 파크(Dove Myer Robinson Park)에서 만난 포후투카와 나무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² 공원 산책길을 걷다 마주친 이 나무는 멀리서 보면 울창한 숲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니 거대한 한 그루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만든 풍경이었다. 부러진 기둥이 땅에 닿은 자리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다시 줄기가 되어 하늘로 뻗어 있었다. 나무 안으로 들어가니 가지들이 얽혀 만든 아늑한 공간이 나왔다. 마오리족이 신성하게 여겨 베지 않고 그대로 두는 나무라서, 아무 방해 없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뿌리를 뻗어온 것이리라.
산책길을 걷다 보니 공원 잔디밭 한편에 뜻밖에 한글이 새겨진 돌 하나가 서 있었다.
'영원히 기억하리'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였다.
뉴질랜드 청년들이 그 먼 한국 땅까지 달려가 싸웠던 기록이 이곳 오클랜드의 흙 위에 새겨져 있었다. 비석에 박힌 돌은 한국 가평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기념비 앞에서 자연스럽게 노래 '연가'가 떠올랐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로 시작하는 그 노래. MT(Membership Training, 대학 야외 모임)마다 모닥불을 피우고, 통기타 소리에 맞춰 밤하늘 아래 함께 불렀던 바로 그 노래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노래는 원래 마오리족의 사랑 노래 '포카레카레 아나'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군인들이 전해준 노래라는 이야기도 있다.³
그 노래의 배경이 된 모코이아 섬은 며칠 전 로토루아에서 이미 내려다보았던 곳이었다.⁴
사랑하는 이를 향해 밤 호수를 헤엄쳐 건넜다는 여인 히네모아의 전설이 노래가 되어 먼 한국까지 건너온 것이었다. 그 노래가 어디서 온 것인지, 무슨 사연을 담은 것인지 나는 몰랐다. 모닥불의 마지막 불씨가 스러질 때까지 어깨를 맞대고 노래하던 그 청춘들은 이제 중년이 되었지만, 한 세대의 청춘을 끌어안았던 그 노래의 뿌리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언덕 위의 나무와 가평의 돌, 그리고 로토루아의 노래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본 건 어쩌면 나무가 아니라, 세상 곳곳을 잇고 있는 거대한 인연의 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¹ 마누카(Mānuka, Leptospermum scoparium)는 뉴질랜드의 척박한 땅에 가장 먼저 뿌리내리는 나무다. 바람을 막고 그늘을 만들며, 뒤이어 올 숲을 준비한다. 숲은 이렇게, 혼자가 아니라 순서로 자란다.
https://www.wai-ora.nz/product/leptospermum-scoparium
² 오클랜드 파넬 지역의 Dove-Myer Robinson Park (일명 Parnell Rose Gardens)에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숨처럼 서 있다. ‘테 하(Te Hā)’라 불리는 이 포후투카와는 약 180년의 시간을 지나온 나무로, 도시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바다의 숨결을 품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Parnell_Rose_Gardens
³ Pōkarekare Ana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전통 사랑 노래로, Mokoia Island을 배경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과 함께 널리 불린다. 신분 차이로 사랑이 금지되었던 히네모아는, 섬에 사는 연인 투타네카이가 밤마다 불어오는 피리 소리를 따라 박을 엮어 만든 부력을 안고 호수를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그 간절한 사랑은 오래도록 노래와 함께 기억되었고, 한국에는 ‘연가’라는 번안곡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통해 전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정설은 아니다.
⁴ 로토루아 스카이라인(Skyline Rotorua)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 있는 스트라토스페어 레스토랑(Stratosfare Restaurant & Bar). 통유리 너머로 로토루아 호수와 모코이아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