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페이지로도 충분한 관계들이 있다

계절처럼 한 번 스치고 지나간 사람

by Roselle

한창 인스타가 막 뜨기 시작했을 때였다.

스무 살 넘기고 얼마 안 됐던 시절.

우리 집 앞엔 빨간 벽돌로 둘러싸인 넓은 할리스커피가 있었고, 나는 거의 출근도장 찍듯 그곳에 앉아 있었다.

할리스가 원래 미국식 로스터리 감성으로 출발했다는데, 그래서인지 동네 카페 중에서 유독 분위기가 있었다.

인더스트리얼 감성의 벽돌벽에 기대다 보면 돌색이 묻어나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커피왕이 만든 국내 커피브랜드 1호인 할리스커피는 멤버십 정책이 스타벅스를 따라갔지만, 매장은 더 넓고 사람은 더 적어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에 적합했다.

개인적으로 초록색보단 빨간색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물론 고교 친구가 알바생인 점도 한 몫했다.


집순이가 못 되는 터라, 나는 아무 일정이 없으면 일단 카페로 향한다.

책을 읽기도 하고, 일기를 쓰거나 과제를 하기도 한다.

가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때면 이어폰 꽂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 시절엔 지금처럼 스토리 기능이 없어서, 인스타에 올리는 사진 한 장이 은근히 기록처럼 남았다.

덕분에 나의 단조로운 일상이 피드에 투명하게 남았달까.

어느 순간부터 내 피드와 비슷한 사진이 올라왔다.

분명 나와 같은 지점의 할리스를 자주 찾는 사람.

해시태그도 별로 없었지만, 구도만 봐도 “아, 저기 창가 자리네” 이런 게 보였다.

그도 나를 알아봤던 것 같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팔로우가 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나올 때쯤 그가 들어가고, 그가 나갈 때쯤 내가 들어갔다.

대화도 그런 식이었다.

“엇? 저도 방금 있었는데요.”

“우와 저도 딱 나왔어요.”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쳤다.

사진 속 느낌이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문 앞에서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꽤 잘생긴 얼굴에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는데, 다부졌다고 해야 하나.

사진에서도 어렴풋이 느껴졌듯 나보다 나이가 조금 있겠구나 했는데, 실제로 아홉 살 정도 많았다.

나는 그가 계속 카페에서 공부하길래 취준생인가 했는데, 소방관이었다.

승진 시험 준비한다고, 비번이나 교대 근무 출근 전엔 거의 매일 카페에 있었다고 했다.


생각보다 그와의 대화가 막힘이 없었다.

우리는 커피잔을 비우고도 몇 시간을 더 있었고, 그날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럼에도 우린 계속 DM으로 소통했다. 뭔가 그게 더 자연스러웠다.

렇게 가끔 만나고, 또 며칠은 연락이 없고.

그게 나쁘지도 않았다.

같은 동네에서 사는, 살짝 가까운 이웃 같은 느낌.


어느 날은 카페에서 만나 동네에서 술을 마셨다.

어느 빌라촌 사이에 위치한 조용한 돼지갈빗집.

거기서 돼지갈비 2인분과 소주를 한 병씩 나눠 마시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깊이는 없고 거리는 유지한 채, 그냥 가벼운 이야기들.

힘들었던 것들, 웃겼던 것들, 지나간 연애, 요즘의 하루.


그 이후로 우리는 연애라고 하기엔 너무 멀고,

이웃이라 부르기엔 가까운 관계가 됐다.

근무표를 공유하거나 개인 일정을 알고 있는 사이.

회식을 하거나 친구들이랑 있을 때면 사진 찍어 보내며 연락하는 사이.

그러다 가끔 집도 드나드는 사이.

요즘 말로 FWB였던 것 같기도.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서로의 외모가 나쁘지 않았던 이성적인 호감 정도?

감정이 있었다기엔 뭘 더 원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감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었던 관계.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서로 연락이 잦아졌다가 느려졌다가.

가끔 보고, 가끔 안 보고.

그게 아무렇지 않았다.

우리 둘 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마음이 상했던 시점도 없었다.

누가 먼저 멀어진 건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끝났다.

시작도 끝도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 같은,

맛집은 아닌 그저 가끔 들르던 프랜차이즈 식당이,

어느 날 보니 폐업하고 새로운 가게를 위한 인테리어 내부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린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꽤 흐르고, 그와 처음 술잔을 들었던 돼지갈빗집을 지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어떤 마음으로 만났을까?

심심해서였을까?

외로워서였을까?

아니면 서로에게 책임이 없는 그 느슨함이, 그 시절의 나에게 딱 맞았던 걸까?


굳이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던 거리.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고, 만나면 편한 온도.


이름 붙이지 않은 채 흘러가다 끝나는 일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가끔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사람 관계가 필요할 때가 있다.

계절이 변화하는 게 입춘이나 입추가 시작됐다고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듯,

봄에 내리는 눈이나 여름에 걸리는 감기처럼, 일상은 아니지만 일어나도 괜찮은.

예측하지 못했지만 타격이 크지 않은 그런 관계가

요즘 들어 그립다.


그 뒤로 나는 관계를 볼 때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

오래가는 건 대단해서가 아니라, 속도가 비슷해서 가능한 일이라는 거.

어떤 사람은 내 하루 속으로 스며들고,

어떤 사람은 잠깐 머물다 지나가고,

그 둘의 가벼움과 무게를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다는 걸.


우리는 잠깐 스쳤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사람 때문도, 나 때문도 아니라

두 사람의 속도와 리듬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뿐.


이제 와 생각하면, 그 관계는 여러 작가의 한 장짜리 작품을 엮어낸 작품집 같았다.

챕터를 이어가는 스토리 없이, 한 페이지에서 끝난 이야기.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내 삶은 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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