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인상
면접을 보고 들어간 회사의 개발팀은 나를 불러준 선배님과 나와 같이 신입으로 들어온 개발자 한 명이 전부였다. 면접을 봤던 부서장님이 계셨지만, 외주 프로젝트 때문에 외부에서 상주하고 계셨기에 회사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으셨다. 선배님에게 대략 얘기는 들었던 터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라는 기대에 부풀어 풍선처럼 부푼 마음이 회사에 와서 터져버렸다. 현실을 자각했다.
회사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둡고 무거웠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기존 개발팀 인원들이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모두 퇴사해 버렸고, 고객사의 컴플레인을 개발자도 없이 맨몸으로 버티느라 다들 지쳐있었다. 그 프로젝트에 엮여 있는 사람들의 눈빛은 죽어있었고, 일말의 희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개발팀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어 보였다.
오죽 관심이 없으면, 내가 회사에 입사하는 날 내가 오는 줄도 몰라서 이메일을 만들거나 회사에서 챙겨주는 기본적인 용품들도 주지 않았다. 딱히 그런 걸 신경 쓰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연초라서 인사팀이 정신이 없었나 보다 하고 넘겨버렸다. 대표님도 나를 카페로 데리고 가서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시는데 표정이 역시나 어두워 보였다. 열심히 잘해보라며 웃어 보이셨지만, 억지로 쓴웃음을 짓고 계시다는 걸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앞서 대표님과 카페에 있던 다른 개발팀의 부장님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드렸는데, "난 올해 복을 못 받을 거 같아서..."라며 말을 흐리신 게 너무 기억에 남았다. '연초라 새해 인사를 한 것뿐인데 반응이 뭐 이렇지?' 라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새해 인사를 저렇게 받아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이 나 때문에 하는 말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다시 돌아와서 회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고, 기존 팀원들은 모두 프로젝트를 더 이상 진행 못 하겠다며 나간 상태였다. 난 최악의 시기에 그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인력으로 뽑혔다. 인력이라고 적었지만, 소방수라 읽어 마땅하다.
내가 정말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내 자리를 보고 나서였다. 자리에는 '싱글 모니터'와 '노트북'이 준비되어 있었다. 개발자에게 데스크탑 PC와 듀얼 모니터를 제공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노트북이 제공되었다. 거기서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이 있었다. 노트북의 사양은 나쁘지 않았지만, 외근을 많이 내보내는 회사라는 걸 말이다.
이후에 일이지만, 개발자들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나빴는지에 대한 사례가 있다. 다른 팀에 신규 개발자가 들어왔을 때, 준비를 못 해서 노트북 모니터 액정이 망가져 반만 보이는 노트북을 임시로 쓰게 하였다. 그분은 이틀 정도 나오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 팀의 팀장님에게 회사에 더 이상 못 나갈 거 같다며 전화를 한 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개발자에 대한 대우와 회사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상상이 가리라 믿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로만 봤던 그저 그런 중소기업들이 있다. '저런 회사를 어떻게 다닐까' 라며 내 인생에는 그런 회사들에 다닐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이전 회사가 개발자에 대한 대우가 좋은 회사라서 그런지 더 비교가 많이 됐다.
이곳은 개발자 위주의 회사가 아니었고, 다른 회사의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 위주의 회사였다. 제품을 만들어 판매할 목적으로 개발팀을 꾸렸지만, 현실은 역시 '돈' 때문에 외주를 받아 개발하는 것에 특화되어 버렸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 시점에는 그런 회사인걸 받아들이고 일 할 수밖에 없었다.
2. 이전 사람들의 유산(Legacy)
끝마치지 못 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인수인계는 고사하고, 들어온 다음날부터 바로 고객 사를 오가며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의 상황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파악을 좀 해보니, 정말 처참했다. 개발된 코드는 어떤 게 최신 버전 인지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명확하진 않지만 최신 버전이라고 하는 코드를 하나 골라 일을 시작했다.
이전 개발자들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은 제대로 기능이 동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고객들의 컴퓨터에 설치되서 서비스 되고 있었다. 프로젝트 완료 기간은 이미 넘긴 지 오래였고, 간신히 고객사를 설득해서 부여받은 일정은 촉박했다. 불난 집에 불을 끄는데 불을 천천히 꺼달라고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난 그 불을 끄기 위해 급하게 불난 집으로 뛰어든 '소방수'였다. 개발하고 테스트 하기에도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다.
개발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고객 사에 방문해서 오류가 발생하는 원인도 파악해야 했다. 개발과 기술지원을 함께 도 맡았다. 기술지원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들도 제대로 된 인력 충원이 되지 않아 인력이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선배님과 함께 거의 매일 밤 10시 이후까지 일 했고, 주말 출근도 불사 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는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했지만, 난 여기서 자리를 잡고 커리어를 쌓고 싶었다.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힌다면 잡아야 했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이후에는 개발자로서 더 좋은 기회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정신없이 일을 해결가며 야근하던 어느 날, 일전에 카페에서 봤던 부장님과 마주쳤는데 "힘들지? 고생이 많아"라며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나를 다독여주셨다. 그 부장님과 이후에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다. 이 유산을 남긴 이전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을... 새로 입사한 사람들의 원망과 분노를 미리 짐작하고 내 새해 인사를 그렇게 받아쳤구나라는 생각이 집 가는 길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