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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감성 Oct 15. 2021

중고 신입 사원

1장

1. 커리어의 시작

첫 회사에서 약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자신감열정만 넘치던 20대 초반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윈도우 운영체제 사용법만 간신히 알았고, 독수리 타자를 치던 '신입'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영문 타자도 자유자재로 치게 되는 '경력직'이 되어 있었다.


시작할 때는 이렇게 오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는데, 군 대체복무까지 마치면서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긴 시간 동안 내 나름대로 기술적 역량을 늘리고, 회사생활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개발만 한 게 아니라 고객지원과 기술지원으로 대부분의 경력을 쌓았다. 어린 나에게 회사는 지원 업무를 주로 시켰고, 나 또한 개발자를 하겠다고 들어왔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개발보다는 당장 급한 지원 업무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는데만 치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거의 모든 업무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많이 성장했구나라는 만족감은 금세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그때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꿈을 떠올렸다. '난 개발자가 되기로 했었는데...' 사실 무엇이 옳은지 이미 알면서도 일이 고되고 힘들어서 지금은 그런 것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기 합리화를 해왔었다. 이제는 일이 너무 쉬워져서 더 이상 핑곗거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때부터 개발자가 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고, 좀처럼 기회가 없을 거 같던 회사에서도 나에게 기회를 주게 되었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얻는다'라는 명언을 그때 실감할 수 있었다. 기회를 받긴 했는데, 나의 실력을 신뢰해서가 아닌 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처음 입사했을 때는 나를 포함해서 6명의 팀원이 있었는데, 하나 둘 떠나고 나니 팀장님과 나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중소기업에서 만연하게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로 인한 인력난이라고 해두고 싶다. 어쨌든, 팀장님은 이 일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전 경험이 전무해 근자감밖에 없었지만, 이건 분명히 기회였다. 잘 안 되면 죄송하다고 머리 숙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깡패라는 말처럼 20대 초반의 나에게 책임을 전가할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도(?)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2년 동안이나 지원하며 고생했던 고객사의 문제를 내 손으로 직해결했다. 그 쾌감과 성취감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감격스러운 첫 경험이 이후에도 개발을 계속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2. 두 번째 커리어

회사에서 개발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할 무렵 군 복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회사를 더 다녀야 하나 새로운 회사로 이직을 해야 하나 다시 큰 고민에 직면했다. 그때 나에게 개발에 대해서 많은 조언을 해줬던 선배님이 퇴사하면서 스타트업에서 함께 일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선배님은 나와 동일하게 회사에서 군 대체복무를 했었다. 그래서 평소에 나를 잘 챙겨주셨었고, "너도 좋은 개발자가 될 수 있다"며 나에게 늘 희망을 심어주던 분이었다.


아직도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며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를 믿고 20대를 나와 불태워보자" 엄청나게 멋지다거나 거창한 말은 아니지만, 날 것 그대로의 의미가 분명히 전해지는 이 말을 듣고 '이 분과 함께라면 내 20대를 맡겨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그날 미련 없이 퇴사를 결심했다.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면 지금 보다 일은 더 많이 하겠지만, 경험해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다양해질 수 있었다. 더 빠르게 많은 성장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그때의 나에게 최적의 업무 환경임이 분명했다.


돈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냥 이전 회사에서 받던 만큼만 받아도 충분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돈보다는 내가 원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굶어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돈이 인생에서 1순위가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돈이 란 건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퇴사하기로 결정하고 퇴사를 통보했을 때, 부장님과의 면담에서 연봉을 25% 정도 인상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기 쉬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돈의 가치가 나에게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그리고 돈 보다 중요한 가치들이 많다는 것을 퇴사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스타트업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치열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결과물을 내놓는 게 결국 회사의 수익과 직결되었고,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 쉴 수 없었다. 거의 1년 동안은 주중과 주말이란 개념이 거의 없이 살았다. 늘 다른 것을 해도 다음 업데이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주중과 주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다. 주중과 주말이 구분되는 삶을 5년 동안 살았기에 몸은 거기에 익숙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몇 개월 지나니 나름 적응이 되었다. 개발자는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을 구분해서 살지 못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숙명인 듯하다. 단순히 정량적인 시간 안에 업무를 끝내지 못하는 모든 직업이 그러하겠지만, 개발도 시간만 채운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 않는다. 일주일이 걸린다고 생각했던 게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한 달이 걸린다고 생각했던 게 일주일 만에 해결되기도 하는 게 개발이다.


돈을 받은 만큼 하는 순수한 '일'처럼 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언제나 개발을 더 잘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특출 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개발은 단순히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나'와 '삶의 목적'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개발을 한다는 것은 '다리'는 건설하는 것과 같았다. 육지에서 저 멀리 목적지로 삼았던 섬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리였다. 다리가 이동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듯이, 개발은 삶의 목적으로 나를 이끌어주기 위한 '자아실현 수단'이었다.



3. 2% 보다 조금 더 부족한 커리어들

창립 멤버라는 자부심과 배민이나 카카오 같은 거대한 기업은 아니더라도 조금 더 자리 잡은 기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출항한 배는 바다의 거센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항구로 돌아왔다. 1년여의 시간 동안 버텼지만, 경영난으로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하고 피드백을 받아서 수정, 보완, 테스트와 같은 단계들을 거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살 '돈'이 회사에는 없었다. 선배님은 나에게 미안해했지만, 그 누구의 탓도 아니였고 한정된 시간 내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때, 이제는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딱 1년만 쉬기로 하고, 자취도 하며 한동안 일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 마냥 쉬기만 하긴 불안해서, 회사에서부터 이어오던 학점은행제를 마무리하고 학사를 취득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앓고 있던 지병으로 다시 편찮아지시면서 생각보다 더 길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회사에 들어가는 대신에 스타트 업에서부터 함께 일했던 선배님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개발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20대 후반이 되어버린 나이와 쌓아온 경력들에 아쉬움이 남았다. 스타트업에서 서비스까지 하며 나름 개발에 자신이 있었지만, 분야를 바꾸고 싶었다. 스타트업을 하면서 대세인 어플 개을 알아두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그 경력이 마지막 경력이 되면서 다른 분야로의 전환이 쉽지 않았다. 처음 개발을 시작했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커리어를 볼때마다 자신감은 흘러버린 시간만큼 떨어져 버다.


 그때,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스타트업을 같이 했던 선배님이 새로 옮긴 회사에 인력을 충원해야 하는데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개발을 처음 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내가 원하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였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면접을 보겠다고 했고, 그렇게 경력직이지만 신입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로 커리어를 바꿀 수만 있다면, 신입도 상관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지옥에 발을 들인지도 모르고 미래를 그리며 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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