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은감성 Oct 24. 2021

자기개발 강박증

3장

1. 고단한 시기를 지나서

몇 달 동안은 최대한 정확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경험 많은 선배님의 조언과 경험에 따라서 인풋이 들어온 대로 아웃풋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일을 했다. 우선 이 고비를 넘어가는 게 중요했고, 난 회의와 대화를 통해서 들은 대로 기능을 수정하고 구현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집-> 회사가 반복되는 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집에 가기만 하면 씻고 자기 바빴다.


개인적으로 술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시기에는 일도 힘들고 달리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같이 일하는 선배님과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술은 조금만 마셔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어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 역할을 했다. 늦게까지 마시고도 회사에 지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늘 30분에서 1시간을 일찍 왔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란 생각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합을 맞춰가며 '하루', '일주일', '한 달'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만 마무리 지어 놓으면 큰 산을 넘어 이제 내리막길로 편하게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출발점이었다. 등산도 산을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듯이, 진짜 어려움은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가면서 찾아왔다.


이제 외근도 줄어들고 회사 안에서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급한 불을 최선을 다해 꺼준 보답으로 회사에서는 업무 환경을 개선시켜줬다. 드디어 데스크탑 PC와 듀얼 모니터를 제공해준 것이다. 물론, 자발적인 것은 아니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준 것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뜬금없이 나를 승진시켜버렸다. 생각지도 못 하게 사원에서 '대리'가 되었다. 연봉도 조금 올려주긴 했지만, 책임을 많이 올려주면서 덤으로 올려준 수준이었다.


사원일 때는 주도적으로 하기보다는 낮은 자세로 더 많이 배우자라는 마음가짐이었다. 주도적으로 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걸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사원'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경력은 있었지만, PC 소프트웨어 개발은 경험이 턱 없이 부족했다. 아직은 내 주도적인 성격과 고집들이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 같다. 대리로 승진하면서 이걸 억제시킬 명분이 사라졌고,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새로운 사원을 한 명 더 뽑아서 그 사원을 이끌 그룹장이라는 직책까지 나에게 부여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회사를 소개해준 선배님은 얼떨결에 공석인 팀장이 되었다.


이제 좀 차분하게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장 실력은 모자라는데 팀원을 이끌고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기 시작했다. 대리에 맞는 수준의 업무 처리 능력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기개발에 더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2. 열등감이 불러온 강박증

원래부터 자기개발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늘 만족할 만큼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그리 믿지 못했다. '나는 아직 부족해'라는 그 마음들을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쌓아왔고, 경력이 쌓인 채로 들어왔어도 사원이라는 직급 뒤에 쌓아온 열등감을 숨길 수 있었다. 내 열등감을 숨길 좋은 핑곗거리가 사라지자, 겉과 속이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인지부조화'가 생겨버렸다. 내면에서는 분명히 너의 부족함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자라고 진실을 얘기하고자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 도움을 구하는 말은 없었다. '해보겠습니다.', '해볼게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등등 긍정적인 말뿐이었다.


도움을 구하는 것은 얕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을 명확히 인지하고 현재 능력에서 벗어난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단, 무조건적으로 능력이 안 된다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내 발전에도 도움을 주지 못 한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서 확인해 보고, 진행사항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공유해드리겠다.'라는 식의 말을 상사에게 전달해 피드백을 통해 일정을 조율하거나, 진짜 필요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선배님을 통해서 나의 경력과 해온 일에 대해서 팀원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게 직급과 주위의 시선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어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켰다. 그래서 열등감과 자존심이 쓸 때 없이 Full 충전되어,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나를 얕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안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자며, 내면의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열등감과 자존심의 콜라보레이션이 홀로 진실을 외치는'메타인지'를 가볍게 KO 시켜버렸다.


자기를 속이는 말들을 보탤수록 자기개발에 대한 강박증에 더 지독하게 시달렸다. 나를 계속 몰아붙였고, 어서 실력을 늘려서 말과 실력을 일치시키고 싶었다. 퇴근 후에는 유튜브, 전문서적, 블로그 등 내 눈에 보이는 자료들을 모두 뒤져서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효과를 보는 듯했다. 배운 것들을 실제 일하면서 적용해보기도 하고 아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폭넓은 의견을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는 것은 사치스럽게 느껴졌고, 이미 목구멍까지 차서 더 이상 못 넣는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억지로 지식들을 집어넣었다. 그런 지식들이 당연히 제대로 소화될 리 없었지만, 강박증은 일단 먹었으니 소화시킨 거라고 믿게 만들었다. 얕게 아는 것을 깊게 아는 거라 착각했다.


얕고 빠르게 익히는 것이 유용할 때가 있지만, 내게 필요한 기술들은 깊게 시간을 들여서 아는 것이 필요했다. 시간의 갭을 줄이려고 발버둥 칠수록 함정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던데, 그때의 나는 '급한데 어떻게 돌아가나 더 빠른 길을 찾아야지'라는 마인드였다.


좋은 도구들을 가졌으나, 그 도구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망치로 못을 내리쳐 못을 박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걸 알았다고 망치로 못을 박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과 같다. 조금이라도 빚 맞으면 못이 대각선으로 박히고, 못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망치로 내리치기도 한다.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게 경험이지만, 경험에 드는 시간을 허들 넘듯 뛰어넘 싶었다.




이전 03화 중고 신입이 들어간 중소 기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