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인 '현존'을 연습하려면,
매 순간 행복하게 삶을 누리다가 반납하고 떠나는 게 좋겠다. 그런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고, 이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에 대해 학문적으로도 연구하고 싶고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조금씩 정리 해나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결과를 나부터 내 삶에서 실천해보고, 경험적으로 그것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나누고 싶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직접 경험해서 느낀 행복하는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한 지식과 배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 이게 현재까지는 내 삶의 목적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게 된 건, 삶과 죽음에 대한 내 오랜 갈증 때문이다. 죽는 게 너무 무서워 10살 때 근 한 달을 잠들 때마다 울다가 결국 엄마까지 못 자게 깨우고 괴롭혔던 걸 시작으로 나는 희한하리만치 사는 내내 삶과 죽음과 행복이 참으로도 큰 화두였다. 그만큼 내게 아이답지 않게, 학생답지 않게 결핍이나 괴로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많이도 부대껴했던 것 같으니까.
행복은 의식이 고요한 상태를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정신분석 이론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임교수였던 브뤼케의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에너지체계이므로 열역학 법칙에 지배받는다.'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무의식에 대한 지정학적 모델을 만들었다. 이와 유사하게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의식이 자연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점점 더 무질서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라고 믿으며 이를 토대로 많은 이론들을 발전시켜왔다. 엔트로피 법칙이 우리 마음에도 적용된다고 가정해보면, 행복은 분명히 가만히 있어도 손에 쥐어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경험적으로 큰 내면적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순간들이 모두 고요하고 무언가 질서를 이룬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식이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있고 가지런한 상태로 있는듯한 '행복'은, 아마도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내버려 둘 때 느끼게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쉽게 말해,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복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으로 나는 현존과 몰입을 꼽는다. 현존은 의식을 깨어있게 해서, 한없이 파란 하늘 아래에 드넓은 초원의 풀들이 선선한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작은 바람소리 하나하나와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 하나하나까지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탁트인 쾌청함을 연상시킨다. 몰입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우주 한가운데에서 나와 내가 몰입하는 대상만이 존재하여 마치 그 대상과 내가 하나인 것처럼 편안하고 고요한 무아지경의 느낌을 연상시킨다. 둘 다 의식이 흐트러지지 않고 매우 고요하면서도 평온한 상태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존재론적 차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특히 현존은 몰입보다 먼저 우리가 배워야 할 의식을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필요조건이라고나 할까.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현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현존하지 못하는 사람이 몰입할 수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현존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나는 20대 때 한국요가지도자총연맹에서 요가지도자과정을 1년 정도 수련했었다. 과정 첫날 가서 받았던 요가지도자과정 교재에는 요가의 어원이 적혀있었다. 교재에 적힌 요가라는 단어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유즈'인데, 이 말의 뜻은 '말뚝'이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은 가만히 두면 이리저리 정신없이 날뛰는 말과도 같아서, 그 말을 날뛰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있도록 말에 목줄을 걸어 땅에 박아두는 말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실 20대 중반의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요가의 어원이 참 요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해하는 요가의 핵심 중 하나는 나의 주의와 마음을 내 몸 바깥이 아니라 몸 내부에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세상과 타인, 내 내면이 아닌 외부 바깥을 향하는 나의 눈과 마음을 내 안쪽으로 향하게 하면, 끊임없이 일렁이는 물결처럼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씩 잔잔하게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도 내가 생각하는 '요가의 정수'이다. 행복이 결국은 '의식이 고요한 상태와 함께 한다'는 이론들과 내 경험적 가설을 감안할 때, 요가는 분명 우리를 행복한 상태로 인도하는 꽤나 직관적인 행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현존은 요가에서 지향하는 상태와 비슷하다. 가만히 이 순간에 고요한 상태로, 하지만 매우 섬세하고 명료하게 깨어있는 의식상태로 존재하는 것. 이 순간에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평온함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쁨은 오랜 요가구루들이나 수행 중인 승려들의 눈빛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깊고 고요한 느낌의 눈동자. 현존이 그런 눈동자를 가능하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의식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현존'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일까.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현존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 된다. 조금 말이 추상적인데, 내 마음과 그로 인한 저항, 마음이 만들어내는 시간, 이로 인한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의식의 상태로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를 수 있게 되면 그것이 곧 현존하는 방법이 된다. 현존 개념의 창시자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에 가장 요긴한 방법은 바로 몸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여보는 것이다. 이는 처음에 명상을 배우는 사람들이 호흡명상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사실 현존은 명상과 거의 유사한데, 모든 생각과 감정, 마음의 동요를 전부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강렬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다른 감정이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자극에 의해 촉발되는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세가지 업(혹은 독이라고도 한다.)으로 '탐, 진, 치'를 이야기한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간단하게 탐은 욕심, 진은 분노를 말한다. 치는 '어리석음'을 의미하는데, 어리석음이란 '만심(萬心)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에 휘둘려서 지금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것, 달리 말하면 '현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삼독(삼독) 중 하나일 정도로 '현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렇게 의식이 고요한 상태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기 위해 ''명상'에서는 호흡명상을 처음에 가르친다. 내 호흡이 내 몸에 들어오고 내 몸에서 나가는 것에 모든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만심이 일어나는 것을 차분히 잦아들도록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는 대상(가령, 감정이나 생각, 마음 등)보다 내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촉각, 후각, 시각, 미각, 청각 등)이 좀 더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기 쉽기 때문에, 처음에는 호흡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처럼 현존하는 것을 연습할 때에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신체감각에 집중해보는 것이 잠깐이나마 현존상태를 경험해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에크하르트 톨레는 자신의 저서 'The power of now'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존재’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의식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여행에서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일입니다. 부질없고 편집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엄청난 양의 의식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주의력의 초점을 생각으로부터 몸 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체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소리'와 관련해서도 에크하르트 톨레는 끊임없이 우리 귀를 통해 들려오는 수없이 많은 일상 속 소음들 사이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고요', 소리자극 사이사이의 틈새에 주의를 기울여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각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볼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공간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차원의 '빈 공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보길 권한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결국은 '무(無)'에 대해, 여러 형태의 감각적 자극들이 가지는 고요함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그 근원적 '무(無)'의 고요함을 지각할 수 있는 연습을 함으로써 우리 또한 다른 자극들로부터 벗어난 고요한 상태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실제로 상당한 연습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 안정감 있는 상태로 호흡명상, 소리명상 등 감각명상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거의 반년이 넘게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연습과정은 우리에게 깊은 내면적 평온과 지그시 우리를 감싸는 고요한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과정이 익숙해지고 나면, 우리는 이제 감각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대상, 즉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접근해가며 현존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실제로 이러한 흐름은 현존하는 연습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불교에서 명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훈련시킬 때 사용해온 흐름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즉, 명상도 처음에는 호흡부터 시작해서 청각, 미각, 촉각 등 감각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지만, 결국에는 내 생각과 감정 등 비가시적인 것들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도록 가르친다. 현존 또한 매한가지다. 우리가 소리 사이사이의 고요함, 공간 사이사이의 비어있음을 자각함으로써 '현존'하는 연습을 할 수 있듯이, 마음에 대해서도 우리의 생각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고 그 생각들 사이사이의 고요함까지도 자각함으로써 명료하게 깨어있는 의식상태를 유지해나갈 수 있게 된다. 톨레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당신은 그 생각뿐 아니라 그 생각의 목격자인 자신 또한 의식하게 됩니다...(중략)... 생각이 자리를 비키면, 당신은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심(無心)'의 틈새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틈새가 처음에는 몇 초에 지나지 않겠지만 점차 길어질 겁니다. 무심의 틈새를 경험할 때, 당신은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존재와의 자연스러운 합일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고요와 평화의 느낌이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현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현존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들을 행복으로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행복하게 삶의 순간들을 채워나가며 삶을 누리는 것이 우리가 나중에 반드시 해야 할 '반납'타이밍에 우리가 덜 후회하도록 할 것이니, 우리는 현존에 대해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존을 위한 연습의 큰 장점은 어느 상황, 어느 순간에나 잠시라도 즉각적으로 해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수업을 듣다가도 업무를 하다가도 언제든지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다. 이 글은 여기서 끝이니, 지금 한 번 연습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P.S) 글이 너무 길어져서 가독성이 떨어질 것 같아 걱정이 되지만, 한 호흡으로 적어놓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은' 글을 두 개로 나누지 않았다. 내용도 점점 내용이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포함되어 걱정이 되긴 하나, 찬찬히 읽어주실 분도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아, 그리고 이 글에서는 오로지 현존하기 위한 연습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현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자 강력한 방해물인 녀석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포스팅을 통해 다룰 예정이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언급한 현존을 위한 훈련방법을 몸에 익히고자 하더라도 분명히 엄청난 방해꾼들이 우리가 현존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그 방해물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는 자기상담가가 될 필요가 있다 ㅋㅋ 어제나 저제나 내일도 모레도 당분간은 이게 내 결론.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