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후자보다 전자에 더 마음이 쉽게 가는 이유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사는가.
두 질문 중 어떤 질문이 더 마음에 와닿는지 모르겠다. 자기상담가 되기 위한 연습이라 생각하고 글을 읽어내려가기 전에 잠깐 멈춰서 과연 나는 어떤 질문에 더 끌리는지 10초 정도 생각해보고 이 글을 읽어주면 좋겠다. 혹시 후자보다 전자가 조금 더 편안한 것 같다면, 왜 그 런지도 한 10초 정도 생각해보기 바란다. 혹시 후자가 상대적으로 전자에 비해 내가 주체가 되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생긴 것처럼 느껴져서 부담스러운 느낌이 드는 거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후자보다는 전자를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왜". 영어로 "WHY".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의 어떤 국면에서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다른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고민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 즉 '왜'라는 질문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단어가 한 가지니까 당연히 한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는 조금은 다른 뉘앙스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 두가지 의미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현재에 관한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내가 항상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은 후자다. 전자는 원인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목적을 찾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누리다가 생을 떠나기 위해서는, 삶의 이유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삶의 이유'의 핵심이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라는 질문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물론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훨씬 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사는가.'이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목적을 찾는 것에 가깝다. 바꿔 말하면 이 질문은 '무얼 위해 살 것인가.'와도 일맥상통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원인을 찾는 질문인 '왜 태어났는가.'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그 이유가 우리 삶의 목적을 찾는 데 핵심적인 힌트나 해답을 알게 될 것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가령 신이 나타나 나에게 '넌 천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내가 세상에 내려보낸거야.' 혹은 '넌 인간들 중에 가장 빠르게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내가 탄생시킨거야.' 라고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려줬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삶의 목적을 천문학에 통달하는 것 혹은 수영마스터가 되는 것으로 설정할 것이다. 아무 마음의 부담없이 말이다. 그걸 삶의 목적으로 정할 때 마음에 부담이 있을 리가 없다. 신이 그걸 위해 날 탄생시켰다는데 뭐. 내가 태어난 이유가 그거라는데 뭐.
예시가 조금 극단적이었지만, 예시와 같은 그런 류의 상황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찾아헤매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이 '왜 사는가'보다 '왜 태어났는가'에 좀 더 쉽게 마음이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저 예시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운좋게 '왜 태어났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에 따라 '왜 사는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얻을 것이고 이렇게 '왜 태어났는지'에 따라 '왜 사는지'를 설정하면 이런 결정에 따라 사는 삶은 '실패'할 위험이 없다. 누군가로부터 애초에 주어진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대로만 살면 성공하지 않겠는가. 이런 내 삶의 운명, 정해진 소명 같은 걸 옆집 꼬마나 동네 슈퍼마켓 주인 아저씨가 내려준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최소한 뭐, 신이나 어떤 섭리 같은 엄청난 존재가 아마도 내게 삶의 목적을 준 것일테다. 이에 따라 사는데 설마 실패할까. 만에 하나 내게 주어진 삶의 이유, 주어진 소명에 따라 살다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책임이 내게 올 위험은 확실히 없다.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 즉, 내가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고 그대로 삶을 살아왔는데 알고보니 잘못된 결정이었고 그게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는 식의 비극이 일어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왜 사는가'보다는 '왜 태어났는가'에 은연 중에 좀 더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삶에 소명이 이미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관점들을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전.혀. 아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 정말 어떤 존재로부터 삶의 이유가 이미 주어져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스스로 삶의 이유와 목적을 결정하는 것만이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도 전.혀. 아니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삶을 행복하게 누리다가 떠나는 길의 첫걸음이자 화룡점정일지도 모르니, 스스로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내게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그런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 대해 조금 더 다가가보자는 것이다. 혹시 내가 어떤 형태로든 내가 내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잠깐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한 방향대로 이끌어가다가 소위 말하는 '실패'에 부딪혔을 때 남탓도 못하고 변명을 할 수도 없을까봐 그 공포에 짓눌려 내 삶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혹시 나도 그런 마음이 내면 깊은 곳에 조금은 자리하고 있어서, 많은 것을 주저하거나 괴로움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마친다. 끝.
P.S) 내가 자기상담가 되기 프로젝트에 글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할 이야기의 종착지는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잘 이해하고 수용하자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타인이나 문화, 사회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평가나 판단없이 자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써나갈 생각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내가 외부의 가치관이나 결정, 관점, 해석에 휘둘리는지를 고민하기 전에, 내가 되려 외부에서 내 삶이나 내 행동과 사고를 결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니, 내가 노예도 아닌데 무슨!'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의외로 우리는 자유에서 오는 행복보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을 훨씬 더 크게 느끼기도 한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본인이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고 해서 그런 자기자신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마음 한 켠에 언제나 그런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고 그건 사람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을 편안히 이완시킨 채 스스로를 한걸음 더 이해해나간다는 차원에서 오늘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잠깐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