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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n 02. 2016

'아가씨'와 책 읽는 남자들

영화 <아가씨>에서 서재와 책을 읽는다는 것


책 읽는 남자는 무죄다. 물론 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남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책 속에서는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상상하는 모든 것이 위험하다. 책 속의 세상과 책 밖의 세상을 구분하지 못할 때 누군가는 마초가 되고, 또 누군가는 꼰대가 된다. ‘찌질이’가 되거나. 어떤 면에서, 추해지지 않으려면(특히 남자의 경우) 가급적 상상은 상상으로만 머물러야 한다.  


책 읽어주는 남자도 죄가 없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를 기억하는가(영화도 좋았지만, 단언컨대 원작이 훨씬 좋다). 15세 주인공 소년이 책을 읽어주던 행위는 사랑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개체였고, 그녀와 대화할 수 있는 통로였다. 어쩌면 그가 읽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36세의 그녀였는지도 모른다. 소년에게 ‘책을 읽는다’는 건 ‘그녀를 읽는다’의 이음동의다.


영화의 주된 배경인 서재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박찬욱 감독과 스텝들.


누군가 자기에게 책을 읽어주기 바라는 남자는 위험하다. 책 읽는 남자, 책 읽어주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변태’일 가능성이 높다.


안 좋은 기억이 하나 있다. 마지막 다니던 직장의 대표는 직원들에게 책 읽기를 권(강요)했다. 자신의 책 읽기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어느 순간 눈치챘다. 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책 읽는 자기를 누군가 읽어주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자기에게 ‘책’을 읽어주면 더 좋고. ‘변태’였다. 가학증도 있었다(실제 무수한 직원을 내쫓았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다).  




◇욕망과 금기의 공간으로서의 ‘서재’  


영화 <아가씨>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서재였다(이걸 서재라고 불러야 할지, 도서관이라고 불러야 할지, 책 공연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도 “서재를 세팅하는데 가장 공을 들였다”고 말한 것처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서재는 시선을 압도한다. 감독은 분명 서재의 조명과 색깔, 책 위치 하나하나를 정하고, 바꾸고, 또 바꿨으리라.


영화에서 서재는 더 이상 사색의 공간이 아니다. 지적 독서의 공간도 아니다. 금기와 욕망이 충돌하는 곳이다. 남자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자신이 상상했던 욕망을 채운다. 그들의 행위도 ‘책을 읽는다’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성적 판타지 충족의 동음이의어였다.    


히데코(김민희)는 이모부(조진웅)가 만든 서재에서 남자들을 위해 책을 읽어준다.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이모부(조진웅)가 만든 이곳에서 남자들을 위해 책을 읽는다. 책을 덮는 히데코의 볼은 늘 붉게 상기되고 이마에는 땀이 흐른다. 페이지가 찢겨 나가 구체적인 묘사가 어려운 대목이나 텍스트만으로 상상의 한계가 있는 대목에서는 직접 몸으로 시연도 한다. 이 정도면 서재는 일종의 공연장이다. 히데코에게 ‘책을 읽는다’는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행위다.


남자들은 히데코가 읽어주는 책을 듣고, 본다. 가끔 한숨과 탄성을 터뜨린다. 영화 <아가씨>에서 책 읽는 남자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본다’는 행위다. 그래서 히데코는 불이 꺼져도 책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반면, 남자들은 서재의 불이 꺼지면 집중하지 못한다.


히데코도 이모(문소리)와 같은 길을 걷게 될 운명이었다. 감옥 같은 서재에 갇혀, 남자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며,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다가, 죽어서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슬픈 운명. 적어도 하녀(김태리)와 백작(하정우)을 만나기 전까지는.   




◇'박찬욱 표' 복수는 계속된다  


이 영화는 결국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박찬욱 감독은 인간을 불행으로 빠뜨리는 욕망과 금기, 그리고 이에 대한 복수야말로 인간의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라고 믿는 것 같다.


그 복수는 비극적이지만, 때로는 통쾌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복수는 한 편의 대서사극이다. 피해자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처절하면서도 가장 통쾌한 복수로 기억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올드 보이>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아가씨>도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아가씨>에서의 복수는 이전 영화보다 덜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 덜 잔인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훨씬 통쾌하고 깔끔한 것은 맞다. 이런 면에서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의 어떤 영화보다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다(칭찬의 의미다). <곡성>을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느꼈던 뭔지 모를 불쾌감, 찝찝함을 이 영화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서재가 가장 눈길을 끌었던 만큼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하녀가 서재의 책을 찢고 부수고 수장시키는 장면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옭아맸던 책에 대한 복수이자 남자들에 대한 복수다. 책이 이처럼 부정적인 상징과 메타포로 읽히는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영화관 문을 나서며 아가씨와 하녀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자신들의 서재에서, 자기들이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by 책방아저씨  blade31@hanmail.net


<p.s : 영화 <아가씨>의 원작은 영국 여류 소설가 세라 워터스가 쓴 <핑거스미스>라는 소설이다. 원작을 읽고 싶은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는데 <아가씨>는 후자에 속한다. 영화를 본 것으로 충분하다.>  


서재에서 히데코의 책 낭독을 듣고 있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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