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급 인턴은 계속된다(2) / 퇴근길은 맨날 지연되고/ 택배야 와주겠니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분다.
지금 영국은 태풍의 영향권. 예전에 한번 강풍 주의보를 무시하고 당차게 다리 건너 있는 요가원까지 걸어갔다가 이렇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몸소 느끼고 오늘은 얌전히 집에만 있는 토요일이다. 냉장고에 먹을 것도 떨어져가는데 마트에 가기는 귀찮고 바람이 두려워서 우선은 집을 고수하는 중. 가만히 보면 참 산다는 건 한국이나 영국이나 똑같다. 가까이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유쾌하고 가끔은 한국상사분과 다를 것 없는 Bossy 함을 가지고 계신, 사실 꽤나 그런 점을 나름 좋아하는 우리 이탈리안 사장님이 크리스마스와 신정 휴가로 10일 정도씩 두 번 휴가를 가신다고 하였다.
놀랐던 점이 있다면, 유럽 친구들은 (진짜로!) 들었던 대로 크리스마스가 우리나라 설날이나 추석처럼 아주 긴 명절이라는 것이 확 와닿았다. 여러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할머니의 레시피인 라자냐를 드신다고 한다. (나는 라자냐가 이탈리아의 명절 음식인 걸 이제 알았다) 그러고는 다 같이 모여앉아 누군가는 할머니의 레시피를 돌아가시기 전에 전수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그런 한국스러운 이야기. 나는 사장님께 우리 집도 명절에 그런 말을 나누곤 한다며 무릎을 쳤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그 레시피를 배운 사람은 결국 없었다)
다른 나라에 와서 영어로 익숙해져야 하는 비영어권 유럽인들 역시도 나처럼 살아가기 위한 영어를 배워나가는 여정은 쉽지는 않아 보인다. 같이 살고 있는 플랫 메이트 친구들 중 프랑스 친구들도 그렇고. 가끔 주방에서 만나면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영어를 서로 못 알아들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일단 문법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서로 못 알아듣기 일 수고, 심지어 발음이 불어 같아지거나 한국말 같아져도 잘 못 알아듣는 상황이 생긴다. 그건 나름 출근 중인, 무급 인턴 코스튬 스튜디오에서도 마찬가지. 이탈리아 발음의 사장님 영어를 알아듣기가 너모 어려웠는데, 한 달쯤 있으니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사장님도 외국인이시다 보니, 내가 못 알아들은 순간을 아주 귀신같이 캐치하신다)
무급 인턴이지만, 어찌 되었던 누군가와 일을 할 수 있는 경험은 늘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다. 그 점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못 알아듣는 순간이 꽤나 공포스럽다는 것도 배웠던 나의 지난 한 달여의 무급 인턴기. 덕분에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게 되는 동력을 받는다 - 나도 꼭 자유롭게 말하고, 듣고, 쓰고, 생활하고 싶어. 입이 간지러운 사람처럼 늘 입술이 간질거린다. 더 잘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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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위에 올려놓은 사진은
엄청나게 딜레이 돼서 결국 나를 다른 역으로 떨궈줬던 지난 목요일 저녁의 퇴근길.
아니 지하철 선생님께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성웅성 뭐를 말했는데, 나는 그냥 안내방송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다 같이 그냥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이동하는 지하철. 엄청난 지연으로 그렇다던데. 아무 데나 떨궈주면 집에는 어떻게 가라는 거냐. 그렇게 집에 도착하니 8시가 넘어있었다. 나는 5시 퇴근이었단 말이오.
아까 말했던 크리스마스와 신정 휴가 땜빵으로 주 2일이 아니라 주 3일을 출근하는 요즘.
덕분에 사장님과 한층 더 가까워진 일터 환경을 주었지만, 하루 종일 서고 등을 구부린 채로 꼬물꼬물 만들어야 하는 의상 스튜디오의 일 특성상 집에 오면 기절하기 일 수다. 영국의 저녁은 센트럴 중심부를 제외하면 한국보다 어둑하고 아주 심심하다. E와 I의 자아가 반반인 나는 내 컨디션에 따라 아주 두 명의 인격처럼 내향과 외향을 반복하는데, 퇴근 후에는 보통 에너지의 충전을 위해 대체적인 시간을 기쁘게 혼자 있고는 한다. 그 덕인지 저녁에 일찍 잠이 들 수 있고, 그 덕분에 아침을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서 무엇인가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암튼, 피곤하고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 + 매일 같이 짬짬이 늘 하는 영어 공부 + 필받을 때만 열심히 하는 구직 준비 (이러면 안 되는데 도무지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못하겠기에 그냥 그런 날도 있지 하며 이런 상태를 받아들이는 중)로 인생의 낙이라고는 먹을 거 밖에 없는 나는, 너무너무 잘 챙겨 먹고 있어서 'What I eat a day in London'이라도 찍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나이 앞자리가 3이 된 이후로 건강 염려증이 심해진 덕분에 영국에서도 체력이나 건강관리에 진심인 편인데, 여기는 알룰로스 시럽은 없어도 스테비아는 있기에 은근히 설탕을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아서 좋다. (나는 당뇨를 무서워한다) 게다가 어쩌다가 먹고 싶은 달다구리는 사 먹고 나면 미친 듯이 단 경우가 종종 많고, 마트에서 파는 간식 꾸러미들을 방앗간의 참새처럼 사 먹다가는 나의 미약한 건강이 금방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19년도의 경험으로 알 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주에 사부작사부작 새롭게 시도해 보았던 나의 키토 베이킹. 여기도 (당연하지만) 아마존에서 아몬드 가루를 판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하고 만들었는데, 너무너무 맛있고 또 만족스러워서 고질병 같은 스트레성 과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아침에 지방을 충분히 먹어주면 오히려 식욕이 안정을 찾는 타입이구나. 나에 대해 알아가고 또 배워가는 게 참 즐겁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과식하는 건 몸도 마음도 종종 힘이 들곤 하니까.
아, 참고로 레시피는 '유주얌'님의 키토 스콘 레시피를 참고했다! 혹시 쓰고 싶은 분을 위해 링크를 하단에 첨부한다 :)
그 와중에 저번 글에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온 소포를 한번 지나친 대가로, 창고에 묶여서 택배가 오지 않고 있다. 이런 덴장 영국 시스템!
세 번이나 재배달을 신청했지만 위 사진의 상태만 3번을 보았고, 영국에서 알게 된 늘 밝고 에너지가 너무 좋으신 씩씩한 언니분께서 그 경우에는 우체국에 가서 받아야 한다고 알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나서 다시 우체국으로 재신청한 상태라는 이야기...
다음 주는 되어야 받을 수 있겠구나 (다음 주에는 제발 받자)
불안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주어지는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하루하루다. 엄마가 생신이라고 하여서 랜선으로 소소한 가족 생일파티에 참여했다. 핸드폰 너머로도 느껴지는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모습이 옆에 있는 것처럼 선했던 오후. 새삼스럽게 더 보고 싶어 찔끔 눈물이 났다. 그리움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묻어넘기는 어느 주말의 오후.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바로 지금 현재를 살자.
다들 오늘 하루도 몸도 마음도 편안한 하루가 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