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무기력이 가져온 선택의 시간

멈추거나 무너질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by jayjay

합격이라는 문턱은 끝내 나에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가까이 다가갔지만, 항상 마지막 순간에 문은 조용히 닫혔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희망은 여러 차례 불합격 앞에서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고, 나는 지쳐갔다. 단순히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배워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는 느낌, 들어온 정보가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금세 사라지는 느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느껴지는 무력감은 점차 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스스로를 루저라 여기며 위로인 듯한 자책 속에 스스로를 감췄다. 시간은 어느덧 몇 해를 훌쩍 지나 있었다. 누구도 내게 결단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문제는 공부가 아니었다. 삶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있었다.

나는 이 시험을 통해 삶에 변화를 주려 했지만, 오히려 그 길은 나를 더 깊은 터널의 암흑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고,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더는 이 길 위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변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고, 다른 환경, 다른 방식, 다른 공기 속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결심을 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도피’라 말할지도 모른다. 실패 앞에서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결국 견디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선택이 곧 생존이었다. 무너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기 위한 도전이었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건 공시생이라는 이름 아래 얻지 못했던 자유와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나는 더 이상 “안정된 직업”이라는 타인의 기준 속에서 나를 구겨 넣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싶었다.

공시생의 삶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날,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으니 지금 나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들, 회피했던 아픔들, 묻어둔 슬픔 하나하나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재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삶의 모양만 흉내 내며 살아왔다는 것을.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결심뒤엔 무작정 떠나기 위한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어디든 상관없었으며,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합당한 설명이 필요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어학연수’라는 그럴듯해 보이는 핑곗거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인터넷 속 지도를 보다 우연히 마주한 한 작은 나라, 피지. 남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지상낙원, 지구의 끝에 걸린 듯한 작은 섬나라. 한국인도 드물고, 정보도 부족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인 끌림을 발산하고 있던 나라. 아는 이 없는 그곳에서라면 도피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뤄뒀던 묵은 빨래 같은 일들을 하나씩 정리를 해 나갔다. 하루하루 피곤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절박했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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