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요 며칠 정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속으로는 지옥을 걸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말을 못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고 내 아픔을 글로 못쓰는 줄도 몰랐다. 힘들면 다 그런 것이었다. 주변에서 힘들어했을 때 도대체 왜 저렇게 까지 하나 했는데, 식음을 전폐해보고 보니 알았다.
길을 건너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인데, 함부로 쉽게 말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맥주를 마시는데 문득 친구가 물었다.
야 현진아. 지금 너 힘들잖아. 엄청 힘들잖아. 그런 너한테 누가 위로를 해준다면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진지하게 말했다. 친구가 내 말을 듣고 웃었다.
도망가자. 도망가자는 말이 듣고 싶어
도망이라는 말을 유독 좋아한다. 현실 도피. 나는 현실이 지치고 힘들면 그렇게 도망이 가고 싶다. 그게 어디든 잠시 그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바다에 가고 싶다. 모르는 도시에 가고 싶다. 자유를 느끼고 싶어 진다.
그래서 도망가자는 말이 듣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묵묵히 내 말동무를 해주다가 함께 도망가줄 수는 없으니 맥주나 사주겠다며 맥주값을 내주었다. 술도 좋지, 라며 웃었다.
예전에는 힘이 들면 일을 했다. 힘이 들지 않아도 일을 했지만 힘들면 더 일했다. 나를 채찍질하고 지친 몸을 뉘이고 잠을 청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몸은 당연하게 망가지고 주변에선 걱정했다. 마음은 더 너덜 해졌다.
잠시 쉬기로 결심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힘들 때 어떻게 해야 되냐는 것이었다. 힘들 때 나는 일을 해야 되는데, 일이 없다. 그럼 나는 어쩌지? 그래서 잠을 택했다. 현실도피성 수면장애, 뭐 그쯤 해두면 되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잠을 잤다.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던 일들도 다 미루고 나는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잤다. 꿈속으로 도망쳤다.
도저히 견디기 힘이 들 때에, 흔히들 힘내, 잘 되길 바랄게, 파이팅 등등의 말을 한다. 진짜 고맙지만 가끔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는 힘을 낼 수가 없는데 힘을 내야 할 것 같은 그런 부담감. 잘 될 수 없는 현실이 다시 다가와 내 곁에 머무는 허망함. 그래서 나는 그냥 내 손을 붙잡고 도망쳐주길 바란다. 아니면 여기가 좋다던데, 잠시 다녀오는 건 어때?라는 말이라던가. 꼭 도망을 당신과 함께 가야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진 않다.
나는 또 도망칠 예정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다에 가고 싶다. 부안은 어떨까? 누군가 말하길, 부안 바다가 예쁘다던데. 부안에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지금 마음으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