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밥

by 안종익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조금 전까지 대진해수욕장의 햇볕은 따가울 정도였는데, 지금은 구름이 하늘에 덮여 있다. 다시 비가 내리려고 준비하는 듯하다.

차는 영해읍을 거쳐서 창수령으로 가고 있다.

영해의 넓은 들을 지나 창수령이 가까워질수록 고추밭이 많이 보인다. 고추밭에는 익어가는 고추를 따기 위해서 파라솔이 밭 가운데 서 있고, 파라솔 안에는 고추 따는 사람들이 꼼짝거린다.

영해에서 창수령 길은 멀지 않은 느낌인데, 실제로 운전해 보면 길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먼 길이다.

끝없는 고추밭과 사과 과수원을 지나서 고개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주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의 군락도 보이고 높이 솟은 봉우리들을 쳐다보면서 깊이가 보이지 않는 산속으로 들어간다.


비가 내리고 시작하고 지나가는 차들도 드물어졌다. 창수령으로 들어가면서 앞도 보지만 계속 주변을 보면서 머물 곳을 찾는다. 밑이 잘 내려다보이고 큰 소나무가 있는 곳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고, 한참을 가니까 눈에 띄는 곳이 나온다. 창수령 8부 능선에 정자가 있고 돌탑이 있는 작은 공원을 만난 것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는 천천히 내리고 산속은 고요하다. 정자 옆을 지나는 차도 거의 없고 조용히 창수령의 숲들을 감상한다.


이곳 창수령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극찬한 곳이기도 하다.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 못하리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여기서 보았다”라고 표현한 글이 있다.

창수령은 영양과 영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은 내륙에서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서 갔으니까 이문열 작가도 이 고개를 세 시간을 걸어서 넘었던 길이다.

한참을 앉아서 차분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작가가 넘을 때의 고갯길은 숲 속으로 난 작은 길이었지만, 이제는 도로가 되어 넘기는 쉽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은 높은 산봉우리와 소나무 향기일 것 같다.


늦은 점심을 위해서 차에서 여러 가지를 챙겨 와 밥을 만들 준비를 한다.

버너를 설치하고 쌀을 손으로 서너 줌 냄비에 담아서 생수로 씻어서 버너에 올린다. 미리 불리지 않은 쌀이 물을 많이 먹을 것 같아 물은 조금 넉넉하게 부었다. 냄비는 금방 끊기 시작하고 냄비 뚜껑이 금방 들려다 내려다 하면서 밥 물이 끓어오른다. 뚜껑이 조금 열어두니까 넘치는 것이 잠시 멈추다가 다시 밥 물이 끓어 흐른다. 냄비 뚜껑을 더 많이 열었다가 그다음에는 버너의 불이 낮춘다. 버너 불을 약하게 조정하고서는 밥 물이 끓어오르는 것이 멈춘다.

어느 정도 지나서 뚜껑을 열어보니까 밥 물은 거의 없고 밥 사이로 난 구멍이 뜸만 들이면 될 것 같아 불을 최대한 줄이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밥을 손으로 집어먹어본다. 밥이 설익어서 생쌀이 더러 씹힌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물을 더 붓고는 버너의 불을 조금 올렸다.

한참 지나서 다시 뜸을 들이고 열어서 밥을 먹어본다. 예상은 밥이 탔거나 질 것 같은데, 밥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도 않았고 고슬 고슬고슬한 것이 잘 되었다.


정자 밖에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다.

비가 내리는 창수령에서 늦은 점심은 맛도 있지만 운치가 있었다. 비가 오니까 차들도 드물게 다니는 산속은 비 오는 소리가 정겹기까지 하면서 멀리 계곡에는 안개까지 감돌고 있다. 비구름이 지나가는 하늘과 맞닿은 산 위에는 풍력발전기가 느리게 돌고 있다.

반찬은 멸치 볶음과 된장과 비닐에 싸 온 김치가 전부이지만 더 바랄 것이 없다.

소풍 가거나 야외에서 먹는 밥이 더 맛이 있듯이 빗속 산속 정자에 앉아서 먹는 냄비 밥은 그 옛날 추억도 생각나고 맛도 그만이다. 아마도 늦은 점심이어서 시장이라는 반찬이 하나 더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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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뚝배기 밥이 생각난다.

소장사를 하시면서 강원도 산골에서 소를 몰고 소 머리꾼들과 같이 새벽에 나서면 오후 늦어서야 큰 장에 도착하기 때문에 중간에서 점심을 해 먹었다고 한다.

그때는 냄비가 아니라 질그릇으로 만든 뚝배기를 가지고 가다가 밥때가 되어 물 좋은 개울가에 도착해 주변에 소를 매 두고, 돌로 아궁이를 만들어서 뚝배기를 걸고 나뭇가지를 주어 밥을 하고, 다른 뚝배기에는 된장을 넣고 소 몰고 오다가 얻은 고추나 호박 같은 채소를 넣어서 끓인 된장과 뚝배기 밥이 그렇게 맛이 있었다고 한다. 그 맛이 주막에서 사 먹는 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고 어른들과 이야기하던 것도 빗속에 냄비 밥을 먹으면서 생각나고, 맛있게 먹는 뚝배기 밥과 된장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창수령에서 직접 해 먹은 냄비밥은 정말 맛이 있었다.

슈퍼에 가면 해 놓은 밥을 사서 끓는 물에 데워서 먹을 수도 있지만, 냄비로 직접 한, 이 밥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냄비 밥이 깊은 맛은 없을지라도 금방 해 먹는 뜨거운 맛은 그만이다. 냄비도 알루미늄 냄비도 있지만 지금은 드물게 볼 수 있는 양은 냄비밥을 하고 싶었다.

노란 양은 냄비가 하얀 양은 냄비가 될 때까지 사용하던 때가 그렇게 먼 날이 아닌 것 같은데, 이제는 노란 양은 냄비도 보기 힘든 시절이 되었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구석에 있는 노란 양은 냄비를 구했다.

양은 냄비 밥이 맛이 나는 것은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아 먹어야 막걸리 맛이 나는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옛날 자취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냄비 밥을 먹고 싶었고, 옛날 냄비 밥을 하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에 밥을 할 자신도 있었다.

창수령에서 먹은 냄비 밥은 그 옛날 자취할 때 먹던 그 맛이었다.

비 내리는 창수령에서 비에 젖은 산속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느리게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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