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수염을 깎지 않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자고, 다시 걸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 세면대 거울을 보면서 양치할 때였다. 거울 속에 낯설지는 않지만, 내 얼굴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거울 속에서 할배의 얼굴을 본 것이다.
내 얼굴이 할배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계속 걸으면서 살이 많이 빠졌고 깎지 않은 수염이 아무렇게 자라서 늘 밭에서 일하시던 볼이 들어간 깡마른 할배의 얼굴이 된 것이다.
순간 놀라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내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순례길은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니까 모든 것은 그대로이고, 변한 것은 내 얼굴과 깍지 않은 수염이었다. 수염이 많지 않아서 길러도 더 멋진 얼굴이 되지는 않지만, 특별히 깎을 일도 없고 그냥 불편하지 않으니까 지내는 것이다.
오랜만에 본 옆집 할머니가 반가워하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청기 어른을 보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청기 어른”은 할배를 부를 때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할배와 키도 비슷하고 얼굴이 똑같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수염을 깍지 않아서 영락없이 할배를 닮았다는 것이다. 할배도 수염 숱이 적었지만 늘 길렀었다. 아마도 깎을 시간에 다른 일을 하려고 그렇게 지냈을 것 같다.
마을에 오랫동안 먼 곳에 갔다가 할배가 돌아온 같은 느낌이다. 그 뒤로도 마을 사람들이 할배를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나이가 들면 조상을 닮아간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내가 할배를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까 조상들이 살아간 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젊어서부터 형제가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도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꼭 닮은 사람도 있지만, 닮지 않은 것 같은 사람도 나이 들어가면서 부모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부친이 아니라 할배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배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친도 오래 사셨으면 할배를 닮아갔을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마을 경로당에서 경험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객지에 있다가 경로당에 어른들에게 인사하러 간 일이 있었다. 경로당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모두 낯이 익은 노인들이었다. 그 옛날에 경로당에 출입하던 어른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계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모두가 그때의 어른들이 아니고 그 자식들이 늙어서 그 어른들과 자리를 교대하듯이 경로당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모두가 부친을 닮아간 것이다.
할배는 아들을 일찍 보내고 아들의 몫인 손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바쁘게 살다가 돌아가셨다.
할 일이 있어서 외롭거나 인생의 의미조차 생각하면 사치일 정도로 부지런히 사셨다. 늙어서 다른 사람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바쁜 삶이었다.
늘 일만 하시니까 주위에서 몸을 위해 보약을 먹으라고 하면, 하신 말씀이 “ 하지 지난 보리밭에 비료 주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나이 들어서 보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으니까 먹지 않겠다는 말이다. 물론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만 돈이 아까워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깡마른 두 볼에 어설프게 자란 수염이 할배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그립다. 지금도 마르고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지나가면 돌아 본다.
내가 그 모습을 닮아간다고 하니까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다.
할배가 노년에 살아가시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늙어서 살아가시던 모습은 앞으로 살아갈 내 모습일 것이다. 할배를 닮은 내 얼굴은 나의 미래를 미리 본 것이다.
나도 그렇게 시간이 가면 모습도 닮아가고, 마치는 것도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사는 것이 별거 없다는 말로 정리해도 별반 다른 말은 아닐 것이다. 할배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보다 끝까지 바쁘게 사신 것에 마음이 더 간다.
할배는 노년을 손자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이 있어서 바쁘게 사신 것이다. 무료하거나 한가한 삶이 아니어서 외로움과 같이 할 시간이 없었다. 마치 자기만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외로움이 적은 노년의 삶이 좋다는 것은 공감한다.
나이 들어서 자주 찾아오는 외로움은 친할 수도 없고, 안 만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만이 해야 할 일이 있어 바쁘게 산다면 안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직도 그런 일을 만나지 못했다.
외로움과 만나기도 하고 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충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인생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할배의 모습만 닮아갈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