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에 흰머리가 많은 남자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여자 두 분이 골목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전에 이 누구 집이었고, 여기에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고, 큰 대추나무가 있어서 가을에 바람이 세게 불면 대추 줍던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옛 기억들을 부지런히 떠올리고 있다.
그렇게 골목을 다니며 마을을 구경하면서도 키 작은 여자분은 바쁘게 사는지, 전화가 계속 와 제대로 보지도 못하다가 어느 때 긴요한 전화가 왔다면서 왔던 골목으로 되도록 갔다.
남은 두 사람은 마을의 골목들을 찾아다니며 옛날을 생각하면서 다정히 걷고 있다.
오늘이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임을 하는 날이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는 이제 폐교가 되었지만, 그곳에 쉬어갈 수 있는 숙박 시설이 만들어져 거기에 오늘 만나기로 한 것이다. 동창들이 모이지 않다가 환갑이 넘어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제는 나이들이 들어서 자기 시간도 있고 예전 어릴 때 친구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한 시기이다. 멀리서도 오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들과 만나는 모임이다. 오전부터 오기 시작해서 계속 모이고 있는 중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늙어진 얼굴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변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일찍부터 한잔 하는 사람도 있고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던 중에 오랜만에 온 고향 마을이니까 동네 구경 가자는 말이 나와서 처음에는 많이 갈 것 같았는데, 그렇게 동네 구경보다 그냥 술을 먹는 것이 좋다는 친구도 있고, 걷기 싫다고 그냥 이야기하면서 보내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여러 명 나왔지만, 조금 가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제 두 사람이 고향마을을 구경 다니고 있다.
마을은 제법 컸지만 한 바퀴 도는데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살던 집들도 많이 변했고 예전에 있던 길도 변한 곳이 있었다. 기억 속에 살던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변한 곳이 많았고 예전에 좋아 보였던 집들은 이제 초라하게 보이면서 사람들이 살지 않은 집들도 많다. 살지 않는 집에서 살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고, 더러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마을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그래도 아직 기억 속에 그대로 있는 마을 뒤 솔밭에 올랐다.
이곳은 멀리서 보면 아직 큰 소나무들이 그대로 서 있다. 기억 속에서 변한 것이 없지만, 올라가는 옛길이 없어지고 다른 쪽으로 큰길이 나 있다. 예전 길을 따라서 올라가려고 하니까 길도 잘 보이지 않고, 나무와 잡초들이 무성해서 기억을 더듬어 헤치고 걸었다. 그래도 어렴풋이 옛길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길이 머릿속에는 아직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까 없어져 숲이 되었다.
어렵게 뒤 솔밭에 올랐지만, 어릴 적에 올라와 놀던 곳은 이제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소나무 사이로 잡초들이 무성하다. 이곳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뒤동산이 아니다.
소나무는 더 자란 것 같기도 하고, 부러진 소나무도 있어서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뒷 솔밭에 올라서 동네를 내려도 보니까, 두 사람은 고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비봉산도 그대로이고 앞산이나 뒷산도 예전에 보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려다보이는 마을도 아담한 것이 옛 기억 속에 동네이다. 멀리 오늘 동창들이 모이는 초등학교에 들어선 건물이 보인다. 누군지 구분은 되지 않지만, 오늘 모인 동창들이 오가는 모습도 보인다. 예전 같으면 이맘때쯤에는 집집마다 저녁 하는 연기가 올라갈 때이지만, 올라가는 연기는 볼 수 없다. 두 사람은 뒤 솔밭에 올라서 낯익은 풍경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이 늙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같이 구경하면서 별다른 감정이나 느낌 없이, 세월이 빠르다는 말만 주고받는다.
뒤 솔밭을 내려오면서 남자는 생각에 잠긴다.
여기같이 마을 구경을 나온 여자 동창은 어린 시절에 만나면, 처음으로 가슴이 콩닥거리던 첫사랑이었다. 그 시절은 보기만 해도 온종일 가슴이 설렜고, 한없이 예쁘던 소녀였다. 그렇게 소녀를 보고 처음으로 가슴 설레던 것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마음이 이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도 설레는 마음은 한결같았고 그 후로 서로 살길이 달라서 멀리 떨어져 살아오면서 만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늘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고, 생각하면 보고 싶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설레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첫사랑이었다. 그런 애틋한 감정이 있던 소녀가 이제는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다 되어간다.
그런 첫사랑의 감정은 어떤 때는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서 같이 고향마을의 골목길을 가슴 설레던 동심의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걷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던 마음속 생각이 이루어진 것이다.
환갑이 넘어서 동창회에 그 첫사랑도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에도 가슴이 설레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설레는 감정은 예전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설레지는 않는 것 같고, 아련한 첫사랑의 감정이 아직도 가슴속에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느낌은 예전만 못한 것이 아쉽다.
처음 만났을 때, 머릿속 예전 소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많이 늙었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살이 찌지 않고 그대로이다. 첫사랑은 옛 친구들과 서로 인사하기에 바쁘지만, 그래도 눈길이 더 간다. 나이 들어도 시끄러운 친구들은 시끄럽고, 조용한 친구는 여전히 조용하다. 반가운 친구들과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와 건강을 묻고, 아직 오고 있는 친구 이야기와 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사정도 이야기 나누었다.
그러다가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이 남았으니까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중간에 돌아가고 또 다른 곳으로 가고 해서 결국은 첫사랑과 둘이서 걷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예전에 그렇게 같이 가고 싶었던 고향 동네 한 바퀴이지만, 가슴이 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서 무디어진 것인지, 세월의 시달림에 동심이 사라진 것인지 이제는 그냥 덤덤하다.
둘이서 옛길을 걸으면서 남자는 여자에게 너는 내 첫사랑이었다고 말까지 해도 가슴은 뛰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날이 오면 서로 손잡고 같이 걸으면서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찰 것이라 상상을 했지만, 오늘은 손잡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첫사랑은 마음으로 간직해야 하는 것 같다.
마음속으로 처음에 갖은 첫사랑 설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중한 감정으로 보관하는 것이다. 세월이 가도 아름다운 어릴 적 감정을 그대로 갖도록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순수한 소녀로 남겨 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사랑은 영원한 소녀인 것이고,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모습을 확인하지 않는 것이다.
첫사랑은 만나지 않아야 아름다운 것인 것 같다. 만난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만나서 나만의 예쁜 감정을 하나 잃어버린 기분이다.
동창회에 나오지 말았으면 하고 후회가 되는 날이다. 별것 아닌 세월에서도 첫사랑처럼 간직하면 좋은 것이 있은 것이다.
아름다운 첫사랑의 예쁜 소녀는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살아가면 즐거움을 하나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첫사랑은 마음속에 간직하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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