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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Dec 18. 2023

추워도 시작하면 걷는다

조용한 시골 새벽에 바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일어난다. 

오늘이 올해 들어서 가장 춥다고 예보가 있어서 그런지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일어나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거실로 나왔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까 아직 밖은 껌껌하다. 아직 동짓날이 일주일이나 남아 밤이 깊을 때이다. 

아침 운동은 오랫동안 한 것으로 날이 어둡지만, 시작할 것이다.

추운 날씨라서 옷을 두껍게 입고서 털모자도 쓰고, 목도리를 이중으로 해서 문을 나선다. 집안 마당은 도로의 가로등이 있어서 잘 보였지만, 대문을 나와서 다리를 건너니까 아직도 깜깜한 길이다. 이렇게 바닥은 잘 보이지 않은 도로이지만, 주위의 어렴풋한 지형과 동네의 가로등의 먼 불빛으로 대강 짐작으로 걷는다. 도로는 버스가 다니는 길이기에 넓은 아스팔트 길이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걷기에는 지장 없다. 웃못에 있는 다리를 건널 때는 심한 강풍이 분다. 잠시 바람을 피해서 뒤로 돌아섰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이년 전 이때쯤에 해파랑길을 걷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바람이 많이 불고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추위라고 하던 때이다. 그 길이 너무 추워서 마스크도 안에는 면 마스크를 하고, 다시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방역 마스크로 해서 두 장을 겹으로 쓰고 걸었다. 그런 추위 속에 걸으면서 생각도 많이 하고, 눈물도 흘렸던 때였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 설음을 안고 걸었던 길이어서 묵묵히 견디며 걸었었다. 사실 추울 때 걸으면 바람만 들어오지 않도록 채비하고 걸으면, 더울 때 보다 쉽다는 사람도 있다. 

걸으면서 가장 많이 느끼고 깨달은 것은 세상이 무섭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약간 방심하거나 생각을 잘못하면 크게 낭패 본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때였다. 다시는 세상을 진지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걸었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짠해지는 느낌이다. 


웃못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까 옛날 교회 사택에 불이 들어와 있다. 시골에 오고는 그 사택에 불이 있는 것은 처음 본다. 늘 불이 없고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 집으로 알았다. 아직 어두운 아침이라서 불이 있는 집은 별로 없는데, 옛 교회 사택에 누가 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 목사가 은퇴하고 새 목사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도 그 목사가 기거하는 것 같다. 교회 사택은 내부를 수리 중으로 그동안 옛 사택에서 머무는 것이다.


교회를 지나서 동네의 마지막인 이 노인의 집을 지난다. 이 집도 불이 켜져 있다. 이 노인은 십여 년 전에 귀촌 한 분으로 월남 파병 용사 출신이라고 한다. 마을에 들어올 때는 집도 새로 짓고 할머니와 같이 들어와 노후를 행복하게 보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어서 하루아침에 독거노인이 된 것이다. 혼자서 큰 집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은 귀촌해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별로 없고 긴 세월을 말없이 텔레비전과 같이 보내는 노인이 된 것이다. 긴 세월을 홀로 지내는 외로운 늙은이지만, 혼자서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을 끝을 벗어나 한 절 길을 걷는다.

이 길은 좌측으로 개울이 돌아가는 곳에 솔밭이 있고, 그곳에 예전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솔밭에 석탑이 3단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 몰래 실어 가고 빈자리만 남아 있다. 실려 간 석탑들은 어느 부잣집 정원에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어둑한 길이지만 멀리 구통 골부터 산등선은 훤한 모양이 나타난다. 날이 밝아오고 있다. 어둑한 들녘에 논에는 볏짚을 말아서 만든 소먹이들이 공룡알처럼 둥글게 논바닥에 놓여 있다. 볏짚은 흰 비닐로 감아 놓아서 잘 보여 들판은 검은 바탕에 흰 점처럼 보인다. 


한절길을 지나서 유동 골에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를 건너면서 깊은 유동 골 산속이 바라본다. 산 계곡이 깊어서 산 짐승이라도 금방 나올 것 같은 계곡이다. 

입구에는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과수원을 하면서 높은 원두막이 있던 곳이다. 할아버지 얼굴이 생각나면서 점심을 가지고 와 원두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두 볼이 들어간 할아버지가 누워 계시던 곳이다. 노년을 유동 골 입구 원두막에서 보내시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는 이곳 유동 골 입구에서 무섭다는 생각보다 외로움이 더 했을 것 같다. 

그때 아마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본인을 바라보는 손자들을 키워야 하는 일이 있었기에 덜 외로웠을 것이다. 


유동 골 입구를 지나서 다시 긴 개울가 도로이다. 이곳도 도로 옆에 있는 개울가는 바로 산 밑에 있기에 가장 으쓱한 구역이다. 들녘이나 멀리 산전에 짐승들을 좇기 위한, 솔라 등에 불빛이 반짝인다. 밤싯골 입구에서 돌아가는 도로에도 솔라 도로 표지판 붉은빛으로 반짝인다. 어두운 길을 걸으니까 그 불빛은 귀신이나 산 짐승들 눈에서 나는 불빛이 연상된다. 

어릴 때 도산 어른이 어두운 밤에 도깨비를 만났다고 한다. 도깨비는 디딜방아가 오래되어서 못 쓰게 되면 보통 논이나 밭도랑을 건너기 위해서 들에 갖다 놓고 건너 다녔다. 그런 디딜방아가 밤에 도깨비로 변해서 사람들을 혼을 빼 지치게 만든다고 한다. 

도깨비에게 홀린 도산 어른은 도깨비가 물을 건널 때는 “도산이 친구야 가시덤불이다, 옷을 내리게” 해서 옷을 물에 젖게 만들고, 가시덤불이 나오면 “도산이 친구야 물이다, 옷을 걷게” 해서 가시에 찔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 도산 어른은 정신을 차리고 마을로 정신없이 도망을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도깨비가 물을 건너면서 옷을 젖게 하고, 가시에 찔리게 하는 장난기 있는 도깨비인 것 같다. 그래도 그때는 그 이야기를 듣고 머리끝이 서기까지 했다.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면서 옆에 있는 산도 올려다보고, 지나온 유동 골 쪽으로 뒤도 돌아보면서 걷다가 보면 다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집집마다 불빛이 있는 것을 보면 노인들이 일어난 것 같다. 

이 마을에도 아직 다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앞에서 한참을 걷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돌아서 집으로 향한다. 이때쯤에 날이 밝아와서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돌아오면서 다시 다리를 건너면서 멀리 보이는 밤싯골 엄마의 산소를 바라본다. 산소도 어렴풋이 보이고 엄마와 증조할머니가 누워 계신 곳이다. 두 분은 영원한 내 편이었고 영원히 사실 것 같았는데, 이제는 볼 수 없다. 시간은 공평해서 누구나 저런 날이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엄마의 산소를 보면서 기분은 그리움이 아니라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밝은 길이 되어서 보이는 윗마을 부선 노인의 논에는 아직 비닐이 그대로 깔려 있고 논이 정리되지 않았다. 부선 노인의 논이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것을 처음 본다. 

이 노인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다음 해에 농사지을 토지를 깨끗이 정리해 놓고 겨울을 보낸다. 

부선 노인이 올봄에 논을 배추밭으로 빌려주었는데, 배춧값이 없어서 업자는 도망가고 논에서 배추가 그대로 썩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늦게 콩을 심었는데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노인은 그래서 힘이 빠지고 일에 의욕이 없어서 그냥 논을 정리하지 않고 놓아둔 것 같다. 평생을 일만 하고 산 노인이 실망이 큰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서 마을에 연기가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아침밥을 짓기 위해서 올라가는 연기는 없고, 화목 보일러에 아침에 나무를 넣기 때문에 올라가는 연기이다. 

그렇게 불던 바람도 잦아들면서 이제 마스크를 벗어도 공기가 차다는 느낌이 들지만, 운동을 하는 중이라 몸에 열기가 있어 맑은 공기를 심호흡하면서 걷는다. 

몹시 춥다는 이 아침도 습관적으로 운동을 했는데, 머릿속에는 내려놓자는 생각이 가득한 아침이다. 

날이 춥다고 그냥 있는 것보다 움직이니까 얻는 것이 있다. 이제는 

내려놓자는 것도 습관화시켜서 내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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