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는 벼 이삭이 거의 올라와서 가을이 멀지 않았다. 이제 보름 정도만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면 벼가 잘 익어 갈 것이다. 넓은 들판에 벼보다 더 키 큰 작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유독 키 큰 작물이 논 한쪽 뚝에 심어져 있다. 멀리서 보아도 잘 보이는 옥수수가 논 뚝에 심어져 있었다. 이른 봄에 옥수수 모종이 다른 밭에 심고 남아서 이곳에 심어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잘 자라지 않아 풀에 쌓여 말라죽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나중에 보니까 논 뚝 풀과 경쟁해서 살려고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새 논둑 풀들과 경쟁에서 이겨 풀보다 키가 더 크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 옥수수를 식혜 덤불이 칭칭 감아서 못살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논둑을 비면서 그 식혜 덤불을 제거해 주었다. 그 뒤로는 옥수수가 그 논둑의 주인이 되어서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열매도 실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옥수수 꼴이 되지 않을 것 같던 것이 들판 한가운데서 당당히 서서 익어 가고 있었다. 멀지 않은 날에 수확할 생각으로 논물을 보러 다닐 때마다 유난히 옥수수에 눈이 갔다.
옥수수를 내일 정도에 수확할 생각으로 논물을 보러 갔다. 그날따라 아침 안개가 자욱해서 멀리 보이지는 않았다. 멀리 보이는 논에는 벼들이 잘 자라고 있어 보였다. 논 가까이 가도 평소와 비슷했고 논에는 물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논물이 들어가는 물고를 확인하려고 중간으로 이동하면서 물고 쪽 논 가장자리가 달라진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벼가 몇 포기 넘어져 있고 가장자리 논둑 밑으로 누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확연하였다. 그것도 한 사람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지난 간 흔적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다른 사람의 논에 들어갔을까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갈 사람이나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안개 낀 논에는 누군가가 논둑 밑으로 급하게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논 모퉁이를 돌아서 논 위 뚝도 밟혀 있고 논둑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원래 위 논둑은 다른 논과 경계를 구분하면서 낮은 둑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뚝도 무참히 밟고 지나간 것이다. 위 논둑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가는 곳까지는 밟은 흔적이 있었다. 그제야 멧돼지가 지나갔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떠올랐다. 주변의 논들을 보니까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여기만 이렇게 멧돼지가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논을 크게 돌아서 반대편에 있는 옥수수가 심긴 논둑으로 갔다. 옥수수가 심긴 논둑도 안개가 자욱했지만 옥수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옥수수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쪽에도 멧돼지가 지나간 것인지 궁금했다. 가까이 갔지만 평소와 달리 옥수수가 모두 누워 있었다. 옥수수는 전부 쓸러 졌고, 옥수수는 모두 먹어 버렸고 옥수수 대도 먹은 흔적이 있었다. 옥수수가 논둑을 따라서 다 심어 놓았으니까 상당히 많았는데 모두 쓸어 뜨려 먹어 치운 것이다. 사람이 해도 이렇게 완전히 처리하기 힘들 정도로 먹어 지웠다.
옥수수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른 봄에 심을 때는 모종이 남아서 이곳 산 밑에 있는 논에 한 줄만 심었지만 억센 풀들 사이에서 풀 넝쿨을 감겨서 힘들게 자라던 옥수수였다. 하루만 빨리 수확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이 확 없어지게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옥수수를 다 먹어치운 멧돼지가 논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다닌 흔적이 있었다. 멧돼지가 지나간 논 안은 벼가 모두 넘어져 있었다. 그러니 멧돼지가 옥수수 같은 것이 또 있는지 다시 내려와 논에 벼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런 생각이 들자 논둑에 그래도 남아 있는 옥수수 잔해를 모두 제거하는 데 신경을 썼다. 하나도 먹지 못했지만 옥수수 잔해를 모두 치우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작업하면서 생각은 옥수수가 아깝다는 것보다 멧돼지가 이곳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멧돼지가 논에 들어가 돌아다녀서 넘어진 벼를 일으켜 세우려고 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논바닥 흙에 발이 빠져서 세우는 벼 보다 밟아서 넘어지는 벼가 더 많은 것 같아 포기하고, 아래 논둑도 보니까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그런데 아래 논둑 입구는 논물이 많으면 넘쳐서 나가는 퇴고가 있는 곳이라 늘 물이 모인다. 이곳에 넓게 멧돼지가 뒹군 흔적이 있었다. 멧돼지가 진흙 목욕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 목욕을 한 것이다. 한참 그 진흙 웅덩이가 된 곳을 봐라 보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들판을 보니까 논둑에 무엇을 심은 곳은 멧돼지가 다녀간 옥수수를 심은 논 뿐이었다. 논둑에 더러 심어져 있는 것은 키 작은 콩들이 더러 심어져 있었고 그 외에 심은 곳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옥수수는 집 가까운 곳에 심거나 집과 붙어 있는 텃밭에 주로 심고 있었다. 사람이 자주 지나다니거나 사람들이 사는 근처에 주로 심는 것이다. 옥수수 단맛이 있기 때문에 멧돼지가 아주 좋아하는 작물인 것이다. 그러니 먼 밭이나 산이 가까운 곳에서는 옥수수를 심지 않는 것이다. 산전에는 옥수수를 심으면 멧돼지를 부르는 먹이가 되는 것이다. 여기는 산전은 아니지만, 산에 인접한 논이므로 봄에 옥수수 모종을 심을 때 산에 멧돼지가 산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생각지 못했다. 아직 산에도 멧돼지들에게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이지만 옥수수의 단맛은 이곳으로 오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하루 뒤에 다시 논물을 보러 갔다. 전날에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논물 걱정은 없었지만 다시 멧돼지가 다녀갔는지 궁금해서 옥수수 심겨던 논둑부터 확인하려 갔다. 다행히 전 날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멧돼지도 영리해서 먹을 것을 다 먹었으니까 헛 걸음은 안 한 것이다. 그런데 아래 논은 콩밭이었는데, 콩밭에 물이 넘치고 있었다. 요즈음 비가 자주 와서 콩밭에 물을 댈 일은 없지만 내린 비가 많아서 콩밭에 고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콩밭에는 배수가 잘 되도록 논 밑에 고랑을 깊이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그래도 비가 왔으니까 고였다고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어디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 가다가 다시 돌아와 아래 논둑을 살펴보았다. 아래 논둑이 터져서 물이 넘치고 있었다. 물이 시간이 갈수록 계속 넘치면 떠진 논둑이 넓어지는 것이다.
처음 발견한 터진 뚝을 흙으로 막았다. 그런데 불과 몇 미터 앞에 더 크게 터져서 흐르는 것이다. 이번에는 삽으로 흙을 퍼서 막았다. 흙을 넣자마자 터진 논물과 같이 쓸려 내려간다. 계속 터진 곳이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일단은 주변에 큰 돌을 들어다가 막아 보았다. 큰 돌은 쓸려 내려가지 않았지만 돌 양옆으로 물이 흘러내려간다. 이것은 주변의 흙으로 간신히 막고 다시 앞을 보니까 여기보다 더 많은 곳이 터지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논에 들어오는 물을 막으려고 물고로 가서 논에 물이 못 들어오게 차단했다. 그러고는 아래 콩밭으로 들어가서 물에 잠긴 콩밭의 흙을 퍼다가 막아 나갔다. 이른 새벽에 생각지도 못한 터진 논둑 물 막기 작업을 계속했다. 아래 논둑이 거의 끝까지 떠져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막아 나갔다. 우리 논보다 아래 콩밭을 망치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정신없이 막았다. 떠진 논둑을 막다가 보니까 멀쩡하던 논둑이 떠진 이유가 알 것 같았다. 멧돼지가 아래 논둑도 밟고 지나간 곳은 다 터지고 있었다. 한 마리가 밟고 지나간 곳에 다른 멧돼지가 또 밟으면 터지는 것이다. 멧돼지의 심술인지 저주인지 다른 곳에는 전혀 없고 옥수수 심긴 논에만 생겼다. 정신없이 논둑을 임시로 고치면서 멧돼지의 농작물 망치는 것이 이웃 이야기처럼 들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까 멧돼지는 만나면 안 되는 동물인 걸 느낀다.
논둑에 찍힌 산돼지 발자국을 보면, 한 마리가 아니고 적어도 서너 마리는 될 것 같다. 어미가 새끼를 데리고 왔을 수도 있고 산돼지 형제들이 여러 마리가 왔을 수도 있다. 만일에 어미가 새끼를 데리고 왔다면 어미가 앞장을 서고 새끼들이 쫓아오면서 논둑을 이렇게 착실히 밟아 놓은 것이다.
멧돼지는 옥수수가 있는 논둑을 먼저 와서 옥수수를 해치우고 그러고는 아래쪽 논둑으로 무리가 밟고 간 것은 반대편 논둑에도 옥수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뚝을 밟고 지나가 보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윗편 논둑을 타고 나오니까 맨 처음 옥수수 있던 논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논둑이 낮은 아래 논둑 모서리에서 한바탕 진흙 목욕을 하고 논 안으로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산으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옥수수 논 만 한 바퀴 다 돌고 밟고 간 것이다. 그렇게 지나간 흔적이 마지막에는 논둑이 터지는 일까지 생긴 것이다. 산 밑에는 산돼지가 좋아하는 것을 심어 놓으면 산돼지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