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이른 아침
아직도 안개가 짙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얼마 전까지 황금빛으로 보이던 논들도 이제는 가을걷이를 해서 황량하기만 하지만, 아직도 과수원의 사과는 붉은빛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가면서 사과나무 밑에 깔린 은색 반사지는 안갯속에서도 빛나는 듯하다. 이 시간에는 농사짓는 트럭만 라이트를 켠 채로 간간이 지나간다. 트럭의 나이트 불빛이 지나가면 다시 안개로 덮여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추수가 대충 끝난 가을의 아침 들녘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늦가을 이른 아침 개울가를 따라서 난 들길에는 안개만 가득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안갯속에 작은 움직임이 있는데, 키 작은 할머니가 검은 외투를 입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할머니는 매일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운동을 나오는 것이다. 한여름이나 겨울에도 앞만 보이면 집을 나서서 아침 운동을 하는 것이다. 아직도 지팡이 없이 등이 야간 굽었지만 허리를 꼬꼿이 세운 채로 걸어간다. 이 길을 수십 년을 걸어온 길이다.
육십여 년 전 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도 저녁 무렵이고, 어린 딸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왔다.
어린 딸 데리고 시집을 온 것이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지만 가까운 집안사람이 몇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어두워 오는데 컴컴한 오두막이 낯설기만 했고, 어린 딸은 낯선 환경에 엄마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준비된 것도 없이 상을 가운데 두고 나이 많은 신랑에게 서로 맞절하고서 첫날밤을 맞았다. 그때도 늦은 가을이라서 쌀쌀한 기운이 있었지만 늙은 신랑이 아궁이에 군불을 넉넉히 넣어서 춥지는 않게 첫날을 보냈던 것이다. 낯선 이곳에 들고 온 작은 보따리에는 딸아이 옷가지와 본인 옷 몇 가지만 가지고 이곳에 시집온 것이다. 전에 살던 시집에서 아침에 나와 어린 딸과 이곳 가까이 오는 차가 없어서 기다리다가 늦게 내려서 십오 리 길을 걸어서 왔다. 자꾸만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음 동네가 다시 시집을 온 동네인 줄 알고 물어보면 더 올라가라고 하기를 여섯 동네를 지나서 나타났다. 그러니 저녁 무렵에 도착했고, 살집도 마을 입구에서 가장 위쪽에 있어 찾아서 올라갈 때 저녁 무렵이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하는 것 같았다.
어린 딸 손잡고 시집을 올 때가 서른이 아직 안 된 때였다. 첫 번째 신랑은 군에서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사변이 나서 연락 한번 못해보고 전사한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믿지 못하고 무슨 착오가 있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전사통지만 받았다. 젊은 나이지만 어린 딸을 데리고 살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 집에서 살 생각을 했지만 첫 번째 시집도 워낙 없는 집이라 어떻게 먹고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쉰 살을 훨씬 넘긴 총각이 결혼을 못 하고 있다고 해서 그곳에 시집가는 것이 살길이라고 부축 키는 중신아비의 말을 믿고, 어린 딸을 데리고 시집을 온 것이다. 그렇게 잘해주던 신랑이 전쟁터에서 인사 한번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시고, 시신도 못 찾고 유품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하니까 가슴에 한이 되었지만, 그래도 산목숨이고 어린 딸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다시 시집을 온 것이다.
두 번 띠동갑이 넘는 영감과 사는 것도 팔자로 생각했지만, 같이 사는 나이 많은 영감보다도 주변에 두 번째 시집을 온 새댁을 색안경 끼고 보는 것이 더 힘들게 했다. 데리고 온 어린 딸이 오랫동안 주눅이 들어서 어린 나이에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영감은 약간 귀가 먹어서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침이면 밥 먹고 일터에 나가서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왔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에 늘 어렵게 살았고 마음은 순했다. 그래도 나이 많은 영감 사이에서 환갑 때 막내아들을 낳았다. 데리고 온 딸은 초등학교만 하고서 도시 공장으로 일 보내고, 다시 시집와서 낳은 세 명의 자식을 먹이고 학교 시키기 위해서 매일 일만 했다. 그런다가 영감이 일찍 환갑이 지나서 얼마 못 살다가 돌아가시고 다시 혼자서 자식들을 키웠다.
앞집에 사는 별난 할머니는 같은 친척이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서 참으면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고, 한집 건너에 사는 중대장 댁의 할머니는 나이도 몇 살이나 적은 사람이 말도 함부로 하고, 할머니 본인 일이 바빠서 중대장 댁 일을 해달라는 것을 못 해주면 두고두고 갈 금은 당했다. 바로 옆집의 새댁은 집안의 아래 동서가 되지만 억세게 생기고 목소리까지 커서 보기만 해도 기가 죽고, 옆집에는 자주 가기 싫었다.
유독 젊을 때부터 서로 질투하고 경쟁이 심했던 조합장 댁은 수십 년 동안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면서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 조합장 댁은 이제 구십이고 할머니가 두 살이나 더 먹었다. 나이 더 많은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다니지만 조합장 댁은 허리가 낫처럼 굽어서 머리나 엉덩이가 땅에 비슷하게 가깝게 해서 걸어 다니다. 그래도 그렇게 으르렁하던 조합장 댁도 이제는 황천길이 멀지 않았는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지낸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비슷한 세월을 산 사람이 두 사람인 것이다.
아직도 앞집 별난 할머니는 나이가 열 살이나 어리지만 뼈와 악만 남아서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고, 중대장 댁은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었고, 옆집의 억센 아랫동서도 중대장 댁보다 먼저 갔다.
동네 전체로 보아도 할머니만큼 나이가 든 사람은 이제는 없다. 적어도 다섯 살이나 어린 노인들이 여럿이 있지만, 모두가 잘 걷지도 못하고 그래도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 건강한 편이고,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잘 나고, 자신만만하게 살던 또래의 아낙들은 거의가 돌아가셨고 한참이나 어린 아낙들이 이제는 굽은 허리로 억지로 다니고 있다. 할머니만 반듯하게 지팡이 없이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자식들도 객지에 나가서 그런대로 살고 있고, 할머니는 아직도 명절 때 자식들이 오는 재미로 살고 있지만 다른 집 자식들은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으니까 집안의 중심 되는 어른이 없으니 명절 때 자주 오지 않는다. 간혹 명절 때에 할머니를 보고 이웃집 자식들은 본인의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할머니가 아무 탈 없이 잘 걸어 다니시니까 자식들도 자주 오고 집안 분위기도 좋은 것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시집을 왔지만, 그 딸이 벌써 칠십 노인이 되어서 할머니를 찾아올 때는 세월이 많이 간 것을 느낀다.
우연 곡절이 많았던 세월이지만 할머니가 가장 잘 살아온 것이다. 아직도 지팡이 없이 아침 운동을 나가니까 앞으로도 오래 이 들에서 할머니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의 아침 운동은 개울가의 도로를 따라서 윗 마을 입구까지 가서는 다시 농노를 따라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 농노 중간에는 할머니의 논이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을 들려서 오면서 이웃집의 논이나 밭에 작물이 커가는 것도 모두 지켜본다. 아직도 안개는 자욱하지만 안개 위로 햇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이른 가을 아침이라 아직도 들에 나오는 사람은 드물고 간간이 차들만 지나간다.
할머니는 아침 운동을 할 때면 그 옛날 늙은 영감의 얼굴도 떠오르고, 전쟁에 못 돌아온 젊은 신랑의 얼굴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래도 여기에 시집와서 서로 얼굴 붉히던 아낙들의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모두가 지나고 나니까 별것 아니었는데 그 아낙들도 그리워진다.
집이 가까워지니까 안개가 많이 걷히고 이제는 앞도 제법 보이고 햇볕도 앞 산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이제 집에 가서 밥 한술 뜨고 다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