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정에서 전화가 온다. 화투하자는 것이다.
노인정에는 나이로 보면 띠동갑보다 더 많은 분이 대부분이다. 그런 노인들이 나를 부르는 것은 화투할 사람이 부족할 때이다. 또래 노인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화투패를 돌리지 못할 때가 생긴다.
노인정에서 지나가는 말로 ”오늘 대리합시다“라고 말을 해 보았다. 순식간에 노인들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겹고 그리운 소리에 얼굴에 웃음이 돈다. 이때 노인정에 모인 노인들이 한마디씩 마음에 있는 말을 하면서 추억과 즐거웠던 그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다.
한 노인이 눈 오고 포근한 날 ”대리“ 한다고 또래 집으로 쌀 모으려고 다니던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노인은 친구들과 대리할 때 즐거웠던 일도 회상한다. 다른 노인들도 모두가 마음속에 있는 옛 추억이 하나씩 나왔다.
그때 그 쌀밥이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때는 쌀밥만 먹어도 맛이 달다고 할 정도로 쌀이 귀하던 때였다.
그리고 무에 양미리를 넣고 만든 찌개 맛은 최고였다고 했다. 그냥 콩나물과 김치만 있어도 그렇게 맛이 있었다고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또래 이성과 같이 밥 먹고 논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던 때였다.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들의 얼굴에서 지나간 세월의 아쉬움과 그리움을 묻어났다.
한참 동안 옛 ”대리의 추억“에 잠기는 노인들의 표정에는 가버린 세월의 미련도 있지만, 살아온 연륜의 깊은 그림자가 배어있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먼저 간 친구들의 이름을 나오고 무용담이 나올 때, 경로당은 그리운 과거 추억으로 빠져든다.
도시에 사는 지인에게 ”대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누가 무엇을 대신하는 것 아니냐“로 돌아온다. 대리가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표정에서 알 수 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도시에서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은 요즘 시골에 사는 젊은이들도 잘 몰랐다. 대리는 한 시절 시골에서 유행했던 또래 모임이었다.
대리는 젊은 또래들이 모여 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쌀과 반찬은 거두어서 같이 저녁밥을 해 먹던 모임이었다. 그 시기는 연말 연초이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겨울방학을 하고 새 학기 시작하기 전이 많았고 구정과 대보름 무렵이었다. 여럿이 몰려다니며 한 사람은 쌀자루에 쌀을 받아서 넣고, 다른 사람은 콩나물을 모았다. 이 무렵이면 집 집마다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이 자라던 때였다. 어떤 집은 김치를 받고 무도 거두어서 ”대리“ 하기로 한 집으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저녁을 만들기 전부터 골목을 무리 지어 다니는 또래들은 마냥 즐거웠다.
한동네에 살면서 사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또래 중에 사는 것이 부족해서 보리나 잡곡만으로 밥하는 집도 있었다. 그런 집은 쌀이 없어서 명절에나 쌀을 구경했었다. 그 집을 지날 때면 쌀이 없는 집 아이는 주눅이 들어서 얼굴이 밝지 않지만, 조금 지나면 밝은 얼굴이 되면서 함께 하는 즐거운 대리 날이었다. 또래들이 그 집에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무나 김치만 받고, 다음 집으로 떠들면 옮겨갔었다. 대리하는 날에는 서로의 차이도 없었고 서로 같은 또래라는 것으로 즐거워했던 모임이다.
그때는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즐겁고, 또 같은 또래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있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있을 때, 함께 해 먹는 밥은 누구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동네에서 오늘은 누구 또래가 ”대리“를 한다고 소문이 나면, 다음날에는 다른 사람들도 서로 경쟁하듯 하던 모임이었다. 가장 의미가 있는 ”대리“모임은 보통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서 이 겨울이 지나면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사람,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으로 일떠나는 사람과 여기서 농사할 아이들이 모여 어른이 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만찬 같은 것이 ”대리“분위기였다.
상급학교로 가려고 마음이 부풀어 있고, 불안하면서 막연한 꿈이 있는 공장으로 가는 아쉬운 마음들이 겹쳐지는 묘한 이별이 있는 분위기였다. 그날 저녁은 낯선 세상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다짐하는 이별의 만찬장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방에 둘러앉아 노래를 불렀다. 누가 선창하면 따라 부르는 노래는 합창이 되어 조용한 마을에 밤이 늦도록 들렸다. 그 노래가 끝이 없을 정도로 이어진다. 모르는 노래도 박수 치면서 같이 어울리면서 모두가 즐거워하였다. 애잔한 젊은 날의 합창은 아무리 불러서 지치지 않았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하기도 했었다. 그 분위기를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고 6년 동안 같이 다니면 들었던 정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제 그렇게 늘 보던 친구들이 서로 헤어진다는 아쉬움이 가득한 자리가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그것은 이제 떠나는 미지의 세상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한 노래는 아쉬움의 소리였다.
겨울밤에 울려 퍼지는 합창 소리는 조용한 마을에 널리 펴져 나갔다. 노랫소리가 마을에 울려 펴졌지만 시끄럽다고 하는 옆집도 없었고, 멀리서 들리는 합창 소리는 겨울밤에 자장가처럼 감미로웠다. 노랫소리가 들리면 오늘 누가 대리를 한다는 것을 마을에서 알았다. 누구 아들 동창들이 모여서 ”대리“ 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누가 벌써 객지로 나갈 때가 된 것도 생각했다.
그러다가 노래를 실컷 하고는 누가 그만하자고 하면 어두운 밤에 집으로 돌아갔다. 같은 마을이 아닌 경우는 상당한 거리의 길을 가면서 멀리 보이는 마을 불을 향해 어두운 밤 달빛을 따라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돌아갔었다.
가끔 객지로 나가서 친구와 만나면 ”대리“ 하던 이야기로 추억을 시간을 웃고,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참 좋은 모임이었을 것 같다는 말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것이 부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날 때 그때의 추억이 한층 더 소중하고 가슴이 훈훈해진다. 소중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 지나간다.
”대리“를 아는 경로당 사람은 나이 차이 불구하고, 같은 세대를 살아온 것 같은 정서의 동질감을 느낀다.
경로당에 화투패를 맞추기 위해 불려 왔지만, 젊은 세대와의 답답함도 공유하면서 노인정의 막내가 되어가는 것이다. 경로당에서 가장 새파란 청춘이란 마음이 드니까 노인들이 앞서 살아온 십여 년이 내게는 살아갈 좋은 방향을 알려준다. 노인정에서 같은 느낌으로 앞으로 정을 붙일 곳이 여기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대리“의 추억은 여기 노인들의 소중한 젊은 날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