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백의 시간

by 안종익

기차가 조용히 지나는 들녘에 눈은 응달진 곳에 남아있다. 먼 높은 산도 꼭대기 부근만 설산이다.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렸고,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한 해도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처럼 빠르게 지난 것이다. 빠른 세월처럼 여러 생각도 스쳐 지난다.

무심히 지나가는 겨울 풍경에 오래 시선이 가고, 멀리 산 밑의 아담한 마을이 아늑해 보인다. 겨울날 바람 막아주고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그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순한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 조금 옆에 있는 빨간 지붕 안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여름날을 이야기하면 웃음꽃이 필 것 같은 상상도 해 본다.


추운 겨울이지만 들녘을 보니까 릴케의 ”가을날“ 시가 떠오른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내리시어 무르익게 하시고,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해 주십시오. ...

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혼자인 사람은 또 그렇게 오래 홀로 남아서 잠 못 이루고 책을 읽거나,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을 무거운 마음으로 헤매일 것입니다.“


홀로인 사람은 잠 못 이루고 긴 편지를 쓰면서 헤매일 거라는 시 귀에서 쓸쓸한 겨울을 예견하는 것 같다.

지금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 가을걷이도 끝난 것 같은 내 삶이 릴케의 가을날처럼 잠 못 이루고 끝없는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정을 이야기한 것 같다.


간간이 어두운 터널도 지나고, 산들도 마을도 바람처럼 그쳐가는 풍경을 바라 따라 보며, 이어져 생각나는 것이 ”바람의 노래“이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지나간 그리운 인연들이 가슴에 남아 시린 서러움이 되었고, 아쉬움은 셀 수 없지만 이제 먼 기억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더 이상 꿈을 꿀 필요도 없고, 남은 날들이 아픔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작은 인생의 이치를 알 수 있는 세월을 살아온 것에 감사하면서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세상만사를 바람처럼 스치는 시간을 살았지만, 아직도 감동이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건 아직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나는 기차의 차장을 보라 보며 끝없이 생각 속에서 지나간 세월보다 남아있는 시간에 생각이 흘러가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일 것이다. 다음에 떠오른 것은 여백이라는 노래이다. ”여백“은 그 제목이 너무 마음에 닿는다.


"내 손에 주름이 있는 건 길고 긴 내 인생에 훈장이고,

마음에 주름이 있는 건 버리지 못한 욕심의 흔적

......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네

마지막 남은 나의 인생은 아름답게 피우리라."


여백은 비어있는 부분이나 공간이다. 잘 이용하면 여운의 맛과 감동이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내 블로그의 이름을 ”왼쪽 여백“으로 정했었다. 왼쪽 여백이라는 것은 해가 서쪽을 넘어가듯 왼쪽은 나의 남은 삶을 시간과 공간이다.

이제는 여백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여백의 시간에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빠른 기차 속에서 먼 하늘 하얀 구름을 보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치듯 들어온다. 삶은 5년만 열심히 살면 충분하다는 글이 떠올랐다.


”일본인 저자의 ”위대한 참견“이라는 글에는 5년을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하루하루를 지내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던지 상관없이 충분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었는지, 불행한 인생이었는지는 마지막 5년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늘 마지막 5년처럼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시한부 암 환자라도, 건강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도 마지막 5년을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마지막 5년이라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인생의 어느 때라도 5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인생의 서편에서는 무기력하고 조용한 시기이다. 찾아갈 곳도 없지만 찾지도 않는 시기이다. 그런 시기에는 삶의 희망도 별로이고 신체적으로도 힘이 빠지고 아픈 곳이 나오는 시기이다. 그냥 조용히 없는 듯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무기력한 겨울이 아니라 앞으로 5년을 치열하게 나를 위해서 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나로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왼쪽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 시간에서 5년을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살아가면 희망도 있고 활기가 넘치는 시기일 것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다음이고 그 시간을 열심히 보내겠다는 것이 그 중심이다. 그 중심은 나를 위해서이다.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나의 마음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바람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라는 것에 따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런 것을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도 받지 않는 오롯이 나를 위해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기차 속에서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살아가야 할 의미를 만난 기분이다. 이런 기회가 생각나게 한 것을 감사하면서, 앞으로 5년이 내가 나를 위한 감동의 시간이 되리라 믿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은 버킷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