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가 먼저일까, 블루가 먼저일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사실 나는 얼마 전부터 '코로나'라는 단어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는 말에 동의를 해버리고 말았다. 의료진 여러분을 포함해 여전히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처음에 가진 경각심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로 감히 '지겹다'는 표현은 쓰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었다. 근데 이젠 정말 하루하루가 지쳐간다는 사실에 두 손을 들어 버렸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의 수많은 인구를 감염시키고, 병들거나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코로나19 때문에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봤더니, 지속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 등으로 갑작스럽게 일상이 달라지면서 '마음의 병'을 얻은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일명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는 이 병, 어쩌면 나도 앓고 있는지 모르는 이 병 말이다.
나는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깊은 우울감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을 때가 있다. 한때는 내 우울감이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타인보다 마음이 여린 데서 기인하는 선한 현상이라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부끄러운 마음에 그렇게라도 포장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볼 때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부족한 것 없이 비쳤을 내가, '우울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주변에 많은 사람이 혼란을 겪었고, 나 역시 큰 혼란과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경제 위기로 생계를 걱정하게 되었고, 안 좋은 개인사까지 겹치면서 심란한 하루가 연속되었다. 정말 '코로나 블루'라는 병명이 스스로를 민망해하지 않을 만큼 코로나의 대유행기에 맞추어 깊은 우울감을 경험했다.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의 합성어라는 이 단어, 썩 반가운 신조어는 아니다. 게다가 신조어라고는 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내용물이 들어 있다. 그냥 어느 때나, 누구나 겪고 있던 증상인데 코로나가 대유행하는 시기에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살짝' 바꿔치기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실제로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코로나 블루' 극복 방법이 기존에 알려진 우울증 극복 방법과 크게 다르지도 않고. 그러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 같다. 우리는 정말 코로나 때문에 우울했던 걸까? 내가 겪었던 그 감정이 정말 '코로나 블루'였을까? 하는.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우울감이 생긴 게 아니라, 코로나 때문에 우울감을 자각할 시간을 벌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바쁘게 사느라 내 감정이 어떤지도 모르던 날이 반복되고,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나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생기는 것은 낯선 경험이다. 물론, 내가 우울한 존재라는 걸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왜 현대인의 대부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실제로 병원을 찾거나 심리 상담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하지 않는가.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스스로 그곳까지 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자신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 순간 정말로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될까 봐' 이런 것들이 두려워서 망설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래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이유로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저는 요즘 우울감을 겪고 있어요." 보다는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어요."라고 하는 편이 훨씬 인정하기 수월한 게 사실이니까.
우울감이 무엇에서 나온 건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되었을 때 우리는 '코로나 블루' 대신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혹시 우리는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라는 말을 대신해줄 수 있는 '원인'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고 싶은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다시 퍼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