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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쪽 Sep 16. 2020

불어라 바람 푸우우웅

그녀는 첫 등장부터 화려했고 요란했다.


우리 아기 돌잔치 때 처음 만난 그녀는 남편 사촌의 와이프이다. 

겨울에 선글라스를 머리에 툭 걸치고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온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 낳은 지 3개월 된 아들을 시아버지 손에 맡겨두고 팔짱을 낀 채 이곳저곳 염탐하듯 둘러보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돌잔치상에 올려져 있는 떡이 먹고 싶어 손을 뻗은 3살 된 내 조카에게

"얘! 이거 너거 아니야. 손 치워"라고 말해 조카가 서러워 엉엉 울었다. 그 3살 된 아이가 내 조카인 줄은 몰랐겠지만 저것이 제정신이가 싶었다. 남의 잔치에 와서, 그것도 처음 보는 내 가족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참 예의가 없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이제 돌 지났으니 안 쓰는 육아용품 좀 달라고 꼭 맡겨놓은 물건 달라는 사람처럼 구는 게 아닌가. 거기에 더해 애기띠 있어요? 책은요? 하고 조목조목 따지고 묻는데 이런 식이라면 누구나 줄려고 쌓아놓은 보따리도 도로 풀고 싶어 진다. 우리 아이 돌잔치를 축하해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용건(?)이 있어 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녀에게서는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독 남편 외가 쪽 가족행사가 많아 그 뒤로도 그녀를 일 년에 2-3번 정도는 스치듯 마주쳤다.

우리 아이는 3월생이고 그녀의 아들이 12월생이니 나이는 같아도 개월 수 차이가 많이 나 아무래도 같이 있으면 우리 아이가 꼭 누나 같다. 키도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말도 당연히 빠르다. 그 집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 우리 아이가 거의 날아다니다싶히 뛰어다니니 이런 것들이 그녀의 심기를 은근히 건드린 모양이다. 만날 때마다 우리 아이를 보고 

"너 엄마 할 수 있어?"

"너 숫자 셀 수 있니?"

"너 어린이집에서 요즘 뭐 배워?"

등등 꼬치꼬치 캐묻는 게 신경 쓰였다.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하는 것들에 대해 그즈음 모든 엄마들은 유난히 집착한다. 옆집 아이는 벌써 뒤집었는데 왜 우리 아이는 멀뚱히 천장만 보는지, 앞 집 아이는 엄마라고 하던데 왜 우리 아이는 침만 질질 흘리는지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의 신경을 자극한다. 돌잔치를 앞두고서도 잘 걷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했던 게 나였으니 그녀가 왜 저러는지 심적으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어디 할 수 있나 한번 보자라는 식으로 애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에 또 한 번 삐걱 소리가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모임에서 또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 아이에게 사탕 하나를 건네길래 나는 아이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해야지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한테까지 친절할 필요 없어"라고 톡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묻자 대답도 없이 휙 돌아서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이번엔 삐걱 이 아니라 삐이이이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태연히 자리에 앉은 그녀는 가족들에게 아들 자랑을 한 바닥 늘어놓았다. 어린이집에서 가위질을 잘해 칭찬을 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숫자를 1부터 10까지 읽을 줄 안다는 것이다. 저러다가 오늘 아침 얼마나 큰 똥을 쌌는지까지 자랑할 셈인가 보다 했다.


찝찝한 마음을 손에 쥐고 식사를 하고 나왔다. 주차장에 서서 온 가족이 빙 둘러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있는데 머리가 흩날릴 정도로 갑자기 바람이 휘이잉 불었다. 그때 우리 아이가 


"불어라 바람 풍! " 


이라고 장풍을 쏘며 소리쳤다. 

일순간 모두가 깜짝 놀라 어떻게 4살 된 아이가 한자를 아느냐고 박수를 치며 아이를 향해 감탄을 했다. 서점에서 우연히 본 마법천자문 책을 몇 번 읽어줬는데 그걸 용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정말 깜짝 놀란 거 바로 나였다. 그 바람풍의 시의적절함에. 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쫒았다. 

바람풍을 맞은 그녀는 거의 울 거처럼 보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변에서는 아이 교육에 열성인 그녀를 향해 오늘부터 한자 공부시킨다고 애 잡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모두 웃었지만 그녀만큼은 웃지 못했다.


애기가 똑똑하다는 주변 사람들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이고 아니에요. 어디에서 주워 들었나 봐요 하면서도 아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폭포야 쏟아져라 물은 뭐지?"


"그거야 당연히 물수지 물 수!"


2년 동안 만날 때마다 슬쩍슬쩍 잔 펀치를 날리던 그녀에게 내 딸이 이렇게 시원한 게 한방을 날려주다니. 백 마디 말보다 이 한방이 더 쎄구나. 

박세리가 맨발 투혼으로 LPGA 우승한 뒤 들어 올린 트로피보다 나는 더 높게 내 딸을 번적 안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웃는 내 얼굴을 보고 아이도 같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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