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러나, 네게 닿진 않았을 테지.
식어버린 밥을 그릇에 담아 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어두워진 밤거리엔 쏜살같이 달리는 차 소리와 조명이 점멸하는 소음이 가득했다.
거기엔 혼란스러운 바깥을 벗어나 평안의 공간으로 도주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하얀 벽 하나로 혼돈과 안정이 가려진 공간, 나는 창밖으로 바라보며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언제나 그렇듯 밥은 식어 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진 냄비가 달궈지는 동안 각종 사려가 생겨나 거기에 빠져들어 버린다.
지난해의 겨울날의 오후, 그날은 언젠가 우릴 찾아올 거라 예상했던 하루였다.
절대로 기다려지지 않지만 기다려야만 하는 하루.
그래서 길었던 하루가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지는 것만 같아 나는 두려웠다.
아마, 너도 그러했겠지.
너의 생일날에 우린 조촐하게 모여 너의 건강을 기원했다.
너는 생긋 웃으며 나지막하게 고맙다고 말했는데 여전히 그 모습이 마음에 잠겨 나를 쑤셔온다.
빠아앙.
쌩 하니 달리는 차의 경적 소리에 나의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달그락거리는 냄비의 뚜껑이 나를 불렀다.
간편식이지만 육개장의 고기 냄새가 올라와 식욕을 건드린다.
식은 밥에 국을 붓는다.
바알간 국물이 밥알 사이에 스며들면 숟가락으로 밥알을 솎는다.
나는 어쩌자고 오늘 식사를 육개장으로 골랐을까.
안 그래도 회한으로 가득 찬 너와의 지난날에 빨간 후회와 매콤한 슬픔이 더해지고 말았다.
이러면 밥 한 술 뜨기가 어려워진다.
다시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점심도 유난히 먹고 싶지 않았었다.
나도 너처럼 입맛이 사라진 탓인지 평소의 식사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억지로 뜬 밥이 입 안에서 돌아다녔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맛이 지겹고 부당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맛을 느끼는 내가 스스로 못마땅했으리라.
그러다 너를 만나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순간 울컥했지만 식당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눈물이 삼켜졌다.
그 빛이 너무 찬란해서 도저히 울 수가 없었다.
먹은 밥 탓인지 무거워진 몸을 끌고 너를 만나러 나섰다.
네가 있어 자주 올랐던 언덕길이 갑자기 낯설었다.
거대한 회벽 사이로 네가 있다는 곳이 점점 가까워졌을 때 나는 잠시 멈추었다.
나는 여기에서 울어야 하는 걸까.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처럼 눈물을 흩뿌리며 온 길을 오열로 채워야 할까.
만약, 네가 들었다면 또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웃었을 텐데.
나는 그저 길을 오르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 공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를 만나러 온 길을 뒤로하고 커다란 문을 앞에 두었을 때, 내가 어떤 표정으로 유리문을 밀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엔 멀건 낯빛으로 방황하는 눈동자를 지닌 나약한 인간이 서 있었다고 기억한다.
너의 이름 세 글자를 방영하고 있는 커다란 TV를 지나자 너를 부르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너는 들었을까.
이토록 많은 사람이 너를 처절하게 불렀음을.
너의 동생이 나를 부르는 순간 나는 너를 만났다.
너의 울고 있는 표정을 마주하고 나는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목구멍을 긁어대었는데 마치 강아지가 앓는 소리 같았다.
너의 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바닥에 내려앉은 가슴이 무거워 그대로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자네가 이렇게 울면 어떡하나…”
너의 아버지가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굵고 큼직한 양손이 나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마, 너도 기억할 거라 믿는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좋았고 어머니가 좋았고 동생들이 좋았다.
가족 간의 정이 부족한 나의 가정에선 만날 수 없는 그 상냥함이 좋았다.
그래서 너를 만나고 네 가족을 알게 된 사실이 기뻤다.
그 커다란 손길이 여전히 상냥했지만 그 끝은 불처럼 뜨거웠다.
너를 보내는 그 불길은 이미 시작되고 있던 것이다.
나는 너의 어린 동생과 앉아 식사를 했다.
하얀 포대 위에 올려진 것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육개장이었다.
“이거 육개장이네?”
“네, 형. 누나도 육개장을 참 좋아했었잖아요.”
그 말에 갑자기 웃음이 났다.
네가 고사리가 듬뿍 올라간 육개장을 좋아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었다.
너의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해서 너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었다.
“이젠, 나도 좋아해. 육개장.”
그때, 나는 너의 동생에게 대답한 걸까.
아니면, 너에게 대답한 걸까.
뜨겁고 감칠맛 나는 국물을 한 움큼 꿀떡 삼켰더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 따뜻함과는 다르게 가슴에선 슬픔이 불처럼 타올랐다.
불길을 잡으려고 눈물이 흘렀지만 심장은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국물이 배인 고기를 눈물과 함께 씹어 삼키며 너의 동생과 나는 연신 코를 풀어댔다.
그 후로 너를 보내는 일은 무탈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너를 사랑했던 이들도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았다.
나 역시 이렇게 저녁을 준비하고 밥을 먹고 있다.
우리가 저녁을 함께 먹던 그날들처럼 간편식 육개장에 고기와 고사리를 따로 넣어 끓여 먹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육개장을 먹어도 울지 않는다.
가끔은 입맛 다시는 아이가 그려진 상표만 보아도 먹먹해지지만 금세 떨쳐 버릴 수 있다.
너는 어떤지 묻고 싶다. 거긴 괜찮으냐고.
나에게 이 세상은 마냥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명령어를 입력한 듯 일상을 수행한다는 건 절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거든.
그래도 나는 묵묵하게 쳇바퀴를 돌린다.
네가 있다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겠지.
괴로운 심정을 나누고 싶다며 나를 가만히 안아 줄 거야.
네가 마치 내 앞에 있는 듯 헛된 망상을 끝으로 나는 그릇을 집는다.
싱크대의 설거지 통에 그릇을 담고 물을 틀어 적신다.
그릇에 남은 육개장 국물에서 매캐한 냄새가 느껴진다.
상처는 언젠가는 아물 거라고 나약한 마음을 먹는다.
봄에는 상처가 꽃피우고 여름에 흉터를 마주하기엔 아직 여린 나를 발견한다.
가을에는 지난 시간이 꿈처럼 다가오고 겨울에는 하루만큼 길어진 밤에 네가 잊혀 사라지길 바란다.
빠아앙.
어디에선가 질주하는 차량의 경적 소리가 들린다.
경적 소리의 꼬리를 잡은 밤이 무섭게 내려온다.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거실의 불을 끈다.
상처를 덮고 이부자리를 만진다.
이젠, 잠에 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