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독서토론 - '여성' 주간>
누군가 내게 우리나라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지체 없이 두 권을 말할 수 있다.
최인훈 작가의 광장과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이다.
한강은 우리나라에도 멋진 여성작가가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녀의 글은 독특하고 개성이 뛰어나다.
나는 한강의 작품을 시집을 비롯하여 여러 권 읽었다.
보통 그녀의 작품엔 개인의 아픔을 내면으로 갈무리하는 인물이 나오며 그들은 대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한강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혜는 자신의 생활이 수치스럽고 무언가를 갈구하는 자신의 욕망이 낯설기만 하다.
그러다 타력에서 오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놓아버리게 된다.
영혜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나?
그녀의 가슴속에 숨겨둔 아픔이 꿈이라는 영상으로 발현하는 순간 영혜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옥죄는 트라우마라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 벗어나지 않으면 질식하며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무덤덤한 태도와 지루한 일상은 방어기제일 뿐이다.
독자인 우리도 알고 있다.
우리 역시 지난 수치와 슬픔을 잊기 위해 모르는 척하거나 아닌 척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 안의 또 다른 자신을 끄집어내기 두려워하고 있으니 손을 내밀어 견제해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우연히 까발려진 자신의 모습은 공허함을 가져다주었다.
영혜는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스스로 자신을 갖추지 못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육식을 거부한다는 것.
그것은 영혜가 선택한 강력한 방식의 항거였다.
육식을 하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파괴한 것이라고 본다면, 채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빙산의 구각에 존재하는 감정을 표면 아래로 뿌리내리고 일각의 껍데기를 위하여 다른 생명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사죄이기도 하다.
또한, 영혜의 궁극적인 목표인 나무가 되려면 지나쳐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동물과 달리 입이 없는 식물, 말이 없는 나무.
이것이 바로 영혜가 나무가 되려는 이유이다.
단지 서있을 뿐이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그녀가 병원에서 입을 열 때는 오로지 물구나무를 섰을 때뿐이다.
두 팔을 뿌리처럼 움켜쥐고 머리를 땅에 깊이 박아 넣고 있는 상상을 해보라.
그래. 그건 죽어 묻히는 관이나 무덤과 바를 바 없다.
정체성이 없다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랴.
동물이 동물로서의 감각을 버린다면 그것은 기어 다니는 모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영혜를 다시 보면 그녀의 생활이 기묘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의 생활은 죽은 듯이 태동이 없었으며 형부와 터부를 깨뜨리고 남긴 이부자리 한 채는 탈피를 마친 뱀의 껍데기 같았다.
사회의 금기를 깨버린 게 무슨 대수인가.
곧 죽을 것인데. 아니, 이미 죽어가고 있는데.
조금 더 관찰하면 영혜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변도 오염되었음을 알게 된다.
최선이 아니라 적당한 선택을 통하여 욕망과 현실을 타협한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남편과 외도를 저지르고 죽어가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갈등도 생동하는 삶이 아니라 속이 비어 허전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 3장을 먼저 읽고 1장과 2장을 순서대로 읽어 보았다.
그러자 영혜의 고독이 짙게 배어 나온다.
나에게도 몽고반점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옷을 들춰 확인하고 싶어 진다.
이번 독서 역시 즐거웠고 토론도 재미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 내 생각을 들은 타인의 피드백이 궁금해 모임에 나선다.
외연의 영향 없이 나의 사고가 부드럽고 견고해질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남을 통해 발견한다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