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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y 26. 2024

무인도

환상기담_1

환상기담_1


무인도


“이제, 이야기를 꺼내 볼까?”

그는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그리고 총구가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늙은 선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후우.

길게 뿜어낸 연기가 비로소, 그의 입을 열었다.


뭐, 별건 아니야. 그저 무인도에 혼자 남겨졌을 때의 일이지.

내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나의 아버지는 하던 사업이 틀어져 부도를 맞았어.

볼트를 생산하던 공장이었는데 은행의 상환 독촉을 끝내 이겨내지 못했지.

우리 집은 곧 재정난에 허덕였고 나 역시 다니던 학교를 휴학할 수밖에 없었어.

그때 나는 삶을 비관하며 하루하루 허송세월하는 벌레에 불과했지.

술과 게임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다가 문득 그런 생활도 지겨워졌어.

그래서 난 곧장 여행을 떠나기로 했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각종 PC 도구와 가전제품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팔아버리고 서해와 남해를 떠돌기로 했어.

여행 도중에 잡일을 해가며 경비를 벌고 지방의 특산물을 먹으며 그 지역의 풍경을 구경하는 방랑자의 삶을 살았어.


그래도 모처럼 사람 다움을 느끼며 살 수 있었지.
그러다 남쪽의 삼천포라는 항구 마을에 가게 됐네.

그곳의 풍광에 감탄하며 며칠을 묵다가 갑자기 주변에 있는 섬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졌어.

다음 날 아침, 나는 선착장의 매표소로 달려가 섬으로 가는 표를 달라고 했어.

“어느 섬으로 가시게요?”

“음, 혹시 무인도도 있어요?”

그 직원은 무인도로 가는 배편은 따로 없지만 낚시꾼들을 위하여 어부들이 자신의 배로 데려다주긴 한다고 했네.

적잖이 실망한 나에게 직원은 어촌 계장을 통해 배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

그렇게 난 항구 사람들의 호의 덕분에 무인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어.

그 배는 오래된 통통배였고 배의 주인은 코가 빨간 할아버지였어.

“아니, 대체 위험하게 무인도엔 뭐 하러 가는 거?”

“그게, 제가 사실 해양 식물이나 동물을 전공하는 학생이라서요. 무인도에 가면 연구할 만한 것들이 많지 않겠어요?”

왠지 무인도에 가기 꺼려하는 눈치이길래 거짓말을 해버렸어.


선장은 엔진을 켜고 통통배가 출항을 했지.

그 시원한 바람과 에메랄드처럼 푸른 바다는 참으로 멋졌어.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나 봐.

“이봐, 학생. 도착했어.”

하얀 모래가 쌓여 있는 곳에 배를 대고 아저씨가 당부를 했지.

“제발, 산책만 하고 깊숙이 들어가진 말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니께.”

“그럼요. 조심할게요.”

나는 고개를 굳게 끄덕이며 대답했어.

“세 시간 후면 어두워지니까 그때 다시 올게.”

“정말, 감사합니다 선장님!”


할아버지 선장의 배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나는 무인도의 여행에 이미 심취해 버렸지.

섬의 모래사장을 홀로 거닐며 조개를 줍고 소라 고동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지.

그냥 모래사장에 앉아 있기만 해도 행복했어.

그러다, 나는 섬의 안 쪽이 궁금해졌어.

당시 TV에선 모험과 여행이 한참 인기를 끌었는데 나도 그 연예인들처럼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

아무 곳이나 들어가 크고 작은 식물들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가니, 울창한 숲 속이 나왔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마치 헨델의 교향곡 같았지.

배 위에선 작게 보이던 섬이 이렇게 커다란 곳이었다니.

나는 섬의 자태에 취했고 한 시간을 더 들어갔어.

그러다 동굴을 발견했지.

지금 자네들이 떠올리는 그런 동굴은 아니야.

어둡고 큰 아가리를 벌리고 선사의 고독과 태초의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을 듯한 그런 동굴 말이야.

큰 개구멍처럼 보이는 햇빛이 잘 드는 입구를 가졌지.

나는 다름 모험가들처럼 그 동굴에 나의 이름을 붙이고 싶었네.

그래서 돌로 벽을 긁어 나의 이름을 새겼지.

동굴 안은 고요했어.

가끔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나의 숨소리가 가장 크게 들릴 때도 있었네.

더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워졌을 때, 나는 스마트 폰의 플래시 앱을 켜고 그 빛의 안내를 받았지.

젊은 패기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나는 최악의 실수를 하고 있었네.

그 동굴엔 가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음악까지 들으며 걷다 실수로 바닥의 푹 꺼진 곳에서 발을 헛디뎠네.

황급히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지.

악 소리도 안 날 만큼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고 그대로 실신해 버렸네.

아마, 나는 거기에서 꽤 긴 시간을 누워 있었던 것 같아.

플래시 앱이 계속 켜져 있었지만 동굴 안이 침침해져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거든.

설마 하는 걱정에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네.

역시, 아니나 다를까.

하늘엔 달이 둥실 떠 있었네.

아뿔싸!

배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급하게 모래사장의 선착장으로 달려갔지만 역시 배는 없었고 망연자실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지.

이대로 섬에 갇혀 하루를 지내야 하는데 식량도 없는 데다 추워지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하염없이 계속 쳐대는 파도를 바라봤어.

남의 속도 모르고 끊임없이 오고 가는 파도가 야속해질 즈음, 비까지 내렸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어느새 억센 빗줄기가 되어 세차게 나를 때렸지.

바다, 특히 섬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더니 맞는 말이었어.

나는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위해 숲으로 달렸어.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도 비를 피할 재간이 없자, 나는 결국 아까 발견한 동굴을 떠올렸네.

가까스로 동굴에 도착한 나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지.


이딴, 객기를 부리다니!

만약, 내일의 날씨도 이 모양이라면 나는 결국 배를 탈 수 없지 않은가.

깊은 걱정으로 잠을 못 잘 것 같았지만 웬걸.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 날 오후에 눈을 떴네.

다행히 해는 보였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어.

모래사장에 다시 가봤지만 배는 결국 오지 않았고 스마트폰의 배터리도 급격히 줄어 있었지.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해 질 녘에 나뭇가지들을 모으기 시작했어.

여기저기에서 쓸 만한 놈들을 찾던 중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네.

그건, 발걸음 소리에 가까웠는데 나는 혹시나 통통배의 선장이나 119 구조대이지 않을까 싶어 소리를 질었어.


“여기에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발걸음 소리는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종종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어.

그러자 나는 더욱 겁이 났지.

어쩌면, 짐승일지도 모르잖아.

무인도에서 짐승의 습격을 받으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니까.

나는 황급히 굵은 가지 하나를 꺾어 돌로 비볐네.

그렇게 뾰족한 날을 세워 내 곁에 두고 있었어.

각종 잎사귀들과 낙엽, 쓰레기 등 부유물들을 모조리 주워 물기를 털어내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네.

정말, 그 라이터가 내 목숨을 살렸지.

한참 불을 피우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네.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한다고 들었으니 곁에 오지 않을 테고 따뜻한 불의 기운이 날 선 나의 신경을 가라앉혀 줄 테니 말이야.


이번에도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곤하게 잠에 빠진 나는 부스럭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었네.

나는 눈만 뜬 상태에서 우선 소리에 집중했어.

그놈의 발소리는 내 주변에서 들려왔는데, 묘하게도 내게 가까워지지는 않았어.

마치 두리번거리며 내 주변을 돌고 있는 소리에 가까웠지.

이 존재가 짐승이 아니란 걸 확신한 순간 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람이 두 발로 천천히 내 주변을 관찰하는 상상이 나를 짓눌렀어.

자박자박.

비가 온 후 진흙을 밟는 소리.

아무런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몸을 언제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어.

그렇지만 불이 약해지는 걸 보자 나는 고민은 사치임을 깨달았지.

나는 잠에서 깬 척하며 일어나 쟁여 둔 나뭇가지와 낙엽들로 불을 살렸어.

그렇지만 나의 온 신경은 불이 아니라 그 발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달라졌어.

착착착착.

그건 달려오는 소리였어.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 재빨리 일어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만약, 사람이 이 섬에 있다면 그건 더욱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는 깎아낸 나뭇가지를 손에 꼭 움켜쥐고 두 눈을 부릅뜬 상태로 놈을 기다렸어.

그러면서도 제발, 이리로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어.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

달리던 발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아마,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흘렀던 것 같아.

허벅지가 아파오기 시작했거든.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두드리고 말았는데 그 소리가 달려오기 시작했어.

탁탁탁.

달려온다.

나를 향해 달려온다!

공포는 나의 근육을 마비시키고 두려움은 더욱 커져갔어.

그놈의 거친 손아귀에 짓이겨지는 나의 육체가 상상되고 나의 가녀릴 피부를 거칠게 씹어 먹는 그놈의 턱이 그려졌다.


그 강한 턱과 근육들.

거친 털과 새까만 손톱.

나는 돌을 마구 던지며 소리를 질렀어.

그러지 않으면 공포에 삼켜져 압사할 것만 같았거든.

“누구야! 넌 도대체 누구야?”

그리고 멈춘 발소리.

깊은 정적과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리고 어디에서도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사르르 소리를 낼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글쎄. 나는 누굴까?”

아! 그 목소리!

성대를 긁어 억지로 내는 듯한 저음, 마치 온 섬이 내게 대답하듯 울려오는 떨림이 가득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늙었는지 어린 지 알 수 없는 성조를 가진 그 목소리.

“나는. 누굴까?”

그놈은 나를 조롱하듯 연거푸 나의 질문에 자문하듯 대답했어.

그 음성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고 바다의 짠내마저도 삼킬 만큼 건조했다.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다른 한 손에 작은 나무를 쥐고 불을 붙였어.

혹여, 이 섬을 다 태워버리더라도 도망갈 작정이었다.

어두워진 숲에서 벗어나 해변가로 달릴 생각이었어.

넓은 곳으로 나가 방어를 하면 내게 유리할 거란 생각에 호흡을 깊게 내쉬었지.

그때, 다시 놈이 달렸다.


탁탁탁탁!

경쾌한 발걸음, 나는 듯한 발소리. 

나는 불붙은 나무를 휘두르며 불을 질러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어.

애초에 멍청한 생각이었던 거지.

한참을 달려 해안가에 도착하자 뜨겁던 땀이 급격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어.

나는 몸을 돌려 날 쫓아오는 놈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어.

하지만 어디에도 놈은 없었어.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달빛이 나무에 붙인 불을 대신할 때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파삭파삭.

모래를 밟는 소리.

그때, 나는 놈을 보았어.

아니, 발자국만 보았지.

푹푹 꺼져가며 발자국을 남기는 모래를.

아무 형체도 없이 소리만 들리지만 모래에 움푹 파이는 발의 형태를 보았다.

기묘한 일이지.

형체가 없는 인간이라니.


두리번거리듯 여기저기 움푹 파이는 모래의 발자국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 소리도 함께 멈췄어.

그리고 다시 긴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이제 완연한 추위를 느끼며 불을 지피지 않으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섰어.

이대로라면 나는 얼어 죽고 말겠지.

죽음의 공포가 나를 압박하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이렇게 죽기엔 나의 삶이 너무 아쉬웠어.

나의 빌어먹을 호기심을 욕하며 나는 혼자 울었어.

눈앞에 선 미지의 적의 공격을 기다리며 말이야.

그때, 나의 눈물을 먹어버리는 저음이 들려왔다.

“어디냐?”

이게 무슨 뜻이지?

바로 네 앞에 있잖아.


“어디냐고!”

그래, 나는 확신했어.

이 놈은 나를 볼 수 없다.

일부러 내가 소리를 내게 만들어 나를 찾고 있었던 거였어.

해안가의 파도 소리가 나의 소리를 쓸어버리고 사라지니 나의 위치를 알 재간이 없었던 거야.

나는 용기를 내어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발길에 차이던 조개껍질을 하나 주워 우리가 대치하는 방향이 아닌 윗 쪽으로 던져 버렸어.

혹시나 그놈의 뒤로 던지게 되어 반대 방향으로 달려들까 봐 고민한 결과였어.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밤바다가 나의 의도를 알아준 걸 까.

세찬 파도가 밀려왔고 섬의 숲에서도 나의 고함이 웅성이며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했어.

그러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움푹 패이는 발자국을 보며 그놈이 달리다가 걷는 것을 반복한다는 걸 알았어.

역시, 내가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기사회생할 수 있다는 희망에 가슴이 뭉클해졌어.

놈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말이야.

“너를, 반드시 잡고 만다.”

음절 하나하나 끊어서 말하는 놈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든 채 한참 동안 서있기만 하자 고요함을 뚫고 들리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에 나는 졸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 졸다니.

그런데 인간이란 그런 존재야.

아주 나약하고 좆같은 존재.

나는 졸음에 못 이겨 떨어뜨린 나뭇가지를 황급히 공중에서 낚아채려다 넘어지고 말았다.

때를 같이 하는 놈의 발소리.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놈이 날 잡기 위해 팔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지.

“드디어 새로 잡는다.”

놈은 뜻 모를 말을 지껄였다.

“히히히히히히히.”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놈은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연신 팔을 휘둘렀어.

나는 계속 한 자리에 있기엔 벅차다는 판단에 바다로 뛰어들 결심을 했다.

물 속이라면 놈도 함께 느려지지 않나?

내 위치를 찾기도 어려울 거야.

나는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굴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개처럼 네 발로 기어 파도에 몸을 맡겼어.

곧 찰방찰방하는 소리가 들려와 놈도 물에 뛰어들었음을 알았다.

나는 슬금슬금 네 발로 기어 더욱 깊은 바다로 향했어.

곧 놈의 움직임이 멈춘 듯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예상보다 차가운 바다의 온도에 덜덜 떨며 빨리 해가 뜨기만 바라고 있었지.


“널, 잡아야, 하는데, 바다에 오래 있으면 안, 되는데.”

놈은 계속 중얼거리며 나를 찾기 시작했어.

나는 아주 조금씩 파도가 치는 소리에 맞춰 놈에게서 멀어지려 발걸음을 떼었다.

나는 지쳐갔지만 이상하게도 놈은 그렇지 않았어.

인간이라면, 함께 지쳐야 할 텐데 여전히 여기저기 찰방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주의를 분산시키고 도망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태양이 빨리 뜨길 바라는 것뿐이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확성기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엔진 소리도 들렸지.


“학생, 이 소리 들려?”

“우리는 해양경찰구조대입니다. 소리가 들리십니까?”

드디어 왔다!

사람들이구나.

눈물이 줄줄 흐르며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갑자기 내 주변의 물이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요동쳐댔다.

놈이었어.

나를 찾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겠지.

“어디있어? 어디있냐고!”

요동치는 물보라가 내게서 멀어지는 걸 보며 나는 기어서 해안 위로 향했어.

곧장, 배로 달릴 작정이었지.

“사람 소리가 들리는데? 이 빛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구조하러 온 사람들이 놈의 목소리에 반응을 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모래를 딛으며 해안가로 달렸어.

구조대의 경비선이 정박한 곳으로 내달렸지.

나는 두 손을 번쩍 들었어.


“여기예요!”

나의 고함에 놈이 반응을 했는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바다에서 나왔을까.

구조대원과 할아버지 선장이 보이고 그들의 뒤로 막 떠오르는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어.

“이런, 날이 밝는다.”

놈은 다급하게 이런 말을 내뱉었어.

언제 온 건지 두 팔을 마구 휘젓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어.

사람들은 나를 발견하고 내게 달려왔는데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어.

“괜찮아요?”

“살려주세요!”

나는 다가오는 구조대원을 향해 몸을 던졌어.

그리고 다스한 손길이 나의 어깨를 잡을 때 온몸의 힘이 빠지더군.

“제발, 발리 출발해 주세요.”

나는 다급히 외쳤어.

그들이 나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지만 나는 놈이 나를 따라올까 두려워 경비정 안으로 달렸어.

너무 황급하게 움직인 탓일까.


나는 경비정의 선실 문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어.

그때, 나의 발목을 움켜쥐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지.

아!

놈이구나.

“잡았다.”

나는 미친 듯 발버둥을 쳤어.

지옥의 빙하가 그런 느낌일까.

살을 에는 차가움과 심장이 덜컹이는 고통이 나를 찾아왔어.

뼛속 깊이 박히는 기분 나쁜 온도에 나는 놈을 떼어내려고 온 힘을 다해 발을 굴렀지.

그러다 이제 본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태양을 맞이했어.

그 태양이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내리쬐는 빛에 놈의 한기가 약해지는 듯 느껴지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모두들 늙은 선원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노인이 여기 있으니 살아남았구나.

안도하는 눈빛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이야기는 이제 끝이네. 나는 결국 살아남았지. 이 훈장을 가진 채 말이야.”

늙은 선원은 오른쪽 발을 들어 올려 모두에게 선보였다.

그 발목에는 손아귀의 흔적이 화상처럼 남아 있었다.

“진짜였어?”

“오오!”

사람들의 탄성 사이로 납치범들 중 하나가 다가왔다.

그러자 모두들 입을 다물고 그를 응시하였다.

“솔직히, 말이야. 나도 그 섬에 대하여 알고 있어.”

“정말인가?”

늙은 선원은 실소와 함께 되물었다.

“물론. 그 섬은 본래 어떤 부자의 부동산이었어. 그 남자는 묘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종의 부활과 영생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부자는 그 섬에서 자신의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하여 괴상한 짓거리를 했다고 하더군.”


“그랬나? 나는 몰랐네. 그 일 이후 그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으니.”

“뭐, 그랬겠지. 어쨌든, 얼마 안 가 그 부자도 섬에서 사라졌으니까.”

이제, 사람들은 납치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섬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귀를 활짝 열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부자를 찾으러 나섰지. 그들이 도착했을 땐 섬의 주택은 폐가가 되어 있었고 아내의 사체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지.”

“호오. 그게 사실인가?”

납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경찰의 수사에 따르면 그 부자가 아내를 죽인 거라더군. 아내가 방탕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대. 둘 사이에 아들도 하나 있었는데 제 새끼가 아닌 걸 알고는 분노에 차 죽여버린 거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늙은 선원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게, 젊은이. 자네도 그러지 않았나. 그 부자가 아내를 살리려고 했다고. 대체 그런 여자를 왜 살리려고 하겠나?”

납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그런데, 그 이유도 밝혀졌어.”

“뭐라고?”


늙은 선원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도 안 돼. 아, 그렇지. 사람들은 항상 소문을 만들어내지. 그럼, 그 중거라도 있던가?”

납치범은 늙은 선원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바싹 다가왔다.

“일기장이 있었어. 아내의 시신에 꽂혀 있었는데 정확히는 그녀의 성기였지.”

사람들의 놀란 신음 소리에 늙은 선원은 짜증을 내었다.

“개소리.”

“아냐. 그 일기장에 쓰여 있었어. 이 추악한 창녀를 단죄하고 다시 성녀로 살려내겠다고.”

“하아. 이보게. 그건 개소리라니까. 일기장 같은 건 없어.”

“야, 이 노인네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넌 그 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며?”

늙은 선원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하여튼 없어. 그건 개소리야.”

납치범은 다시 담배를 한 입 빨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넌 뭐야, 이 새끼야. 나이를 처먹으니 초능력이라도 생겼어? 일기장은 그들의 아들이 챙겨 갔어. 그리고 많은 돈을 들여 부모가 가진 비밀을 묻어 버렸지. 그러니, 너 같은 새끼가 몰랐던 거야.”

늙은 선원은 그의 눈빛을 피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콧바람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건, 참. 미친 소리구만.”

“하. 이 새끼가 진짜 열받게 하네. 야, 넌 그저 여행한 사람이었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들은 추악한 자신의 핏줄을 감췄어. 자신의 엄마가 그런 창녀였다는데 맨 정신에 그걸 견디겠어? 차라리 지워버린 거야. 그 더러운 년 탓에 자신도 어디에서 온 놈인지 모르니까 말이야.”

“개소리.”

늙은 선원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 그가 왜 납치범에게 쓸데없이 말대답을 하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납치범은 갑자기 실소를 터뜨리다 뚝 멈추고 늙은 선원과 사람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야, 믿어. 그 아들이 네 눈앞에 있잖아. 사실이야.”

술집 안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이제 그들은 납치범과 늙은 선원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끝을 보고 싶었다.

늙은 선원은 납치범을 멀뚱히 보더니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뚝 멈추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따져 물었다.

“넌! 넌 그 아들이 아냐!”

“무슨 근거로? 난 그 섬에서 방학을 보내기도 했어. 엄마는 그 섬에서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지. 내가 봤거든. 그 더러운 헐떡임을 말이야. 그 여자는 달빛 아래에서 옷을 다 벗고는 몸에 모래가 잔뜩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어. 그리고 그 어린 창 놈의...”

늙은 선원이 납치범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납치범은 슬쩍 몸을 돌려 피하더니 늙은 선원을 발로 찼다.

늙은 선원은 바닥에 거꾸러졌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개새끼. 넌 그 아들이 아냐!”

“그러니까. 무슨 근거로?”

“그 섬은... 그 섬은 자식을 갖지 못해서 극도로 피로해진 아내를 위해 산 섬이야. 애초에 아들 따윈 없었다고! 아내가 이상한 종교에 빠지긴 했지만 어쨌든 자식은 없었어!”

납치범은 씩 웃으며 권총을 꺼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지만 두 눈만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응? 넌 그저 나이만 처먹은 선원이잖아.”

늙은 선원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납치범은 권총의 총구를 늙은 선원의 이마에 대었다.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살려주도록 하지. 그게 우리의 구두계약이었잖아?”

늙은 선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섬엔 저주받은 동굴이 있어. 내가 갔던 그 동굴이야. 아내는 그곳에서 고대의 신전을 발견하고는 불사의 몸을 가지면 나중에 시간이 흘러 임신이 가능한 시대가 오지 않겠냐고 물었어.

솔직히 나는 믿지 않았지. 그걸 누가 믿겠어! 나는 그냥 아내를 위해서 그 괴상한 의식에 참여했을 뿐이야. 그런데 그게 정말 되더군. 그런데, 그런데. 아내는 내가 죽었다고 믿어 버렸어.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여기더군. 그러더니, 결국 섬을 떠나버렸어.”

늙은 선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한 게 된 것이다.

납치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너는 거짓말을 한 거네?”

늙은 선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어. 나는 참을성이 그렇게 좋지 않아.”

늙은 선원은 커다란 결심을 한 얼굴로 납치범에게 말했다.

“그건 악마의 장난이나 마찬가지야. 불사의 몸을 얻는 게 아니라 계속 찾아다녀야 하는 저주였어. 게다가 육체라는 실체가 없으니 보이지도 않아. 아무도 찾지 않는 섬에서 떠돌며 사람을 찾고 있었어. 방법 따윈 몰라. 그냥 그 학생을 만났을 때, 그에게 달려들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야.”

납치범은 늙은 선원의 이마에서 총구를 떼어 잠시 자신의 무릎 위에 두었다.

“그럼, 네가 말한 이야기에서 목소리의 정체는 너였다는 거네?”

늙은 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나였어. 그러니까, 너는 내 아들이 아냐.”

납치범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빙고.”


탕! 강선을 때리는 격발음과 함께 화약 냄새가 늙은 선원의 심장을 관통했다.

하얀 연기 사이로 늙은 선원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씨발, 어떻게 얻은 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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