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을 잃어버린 듯 흐릿하게 덧칠된 세상에는 소리도 숨어 버려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발소리만 거리에 크게 울리는 게 기이할 뿐이다.
어떻게 지냈어?
“음. 나는 잘 지냈어. 미안. 그동안 소식이 너무 없었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머뭇거린다.
여전히 해맑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뭐 하고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중이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뒤적여 단어를 찾는다.
괜찮아. 너만 잘 지냈다면.
“고마워. 여전히 친절하네?”
밝게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안도한다.
한숨이 짙게 나온다.
그래, 잘 지낸다면 그걸로 된 거다.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타오르는 사이로 우리는 계속 걷는다.
좁은 길을 벗어나 비로소 널따란 길이 나타나고 어디에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분명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채의 공간이었는데 이상하다.
우리는 네게서 기별이 없길래, 무척 걱정을 했어.
“아! 애들은 잘 있니?”
응. 우리야 별일 없지. 넌 그동안 뭐 하고 살았어?
“나는 그동안 정리할 일이 많았어. 그래서 연락할 수가 없었어.”
아,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음. 내가 언젠가 언니 이야기를 했던 거 기억나?”
나는 그녀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나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의 언니라는 사람이 낯설지 않다.
분명히 들었던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의 못난 기억력을 탓하지 않는다.
“언젠가 언니가 병상에서 환하게 웃던 날이 있었어. 항상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이었는데, 그날은 전혀 달랐어. 파리한 얼굴에 붉은 생기가 돌고 눈빛이 반짝였어.
나는 우리 언니의 병환에 차도가 생긴 게 아닌가 생각했어. 그러니까 얼굴빛이 좋구나.
나는 언니에게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어. 내심, 수술이나 약제가 잘 듣기를 바란 거야.”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에 비친 씁쓸한 웃음을 보며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네가 왜 한숨을 쉬고 그래?”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나 보다.
“네 예상대로 언니의 대답은 나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어. 언니는 말했어. ‘죽어도 끝이 아니래!’라고. 우리는 죽어도 육신을 벗어날 뿐, 끝이 아니라면서 환하게 웃었어. 그게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웠어. 언니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병상의 머리맡에 놓인 검고 두꺼운 책이 보였어. 그제야 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았어.”
그게 뭐였는데?
나의 궁금증 위로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자 가로등의 어딘가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