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공부를 하기 위해 읽는 독서를 제외한다면 즐겁기 때문에 읽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이방인과 설국을 추천했다.
일부러 첫 구절부터 멋들어진 작품을 골랐던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유명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모르는 사람이 꽤 있다.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대표작품인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와 함께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언어와 정서의 아름다움을 논한 뛰어난 소설이다.
누군가는 다자이 오사무를 꺼내며 그의 허무함과 닮아 있다고 하지만 그 결이 다르다고 본다.
우선, 다자이 오사무는 무뢰파에 속하는 문인으로 허무주의와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았다.
그에 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신감각파에 속하여 언어로서의 아름다움, 즉 고국어인 일본어를 매우 감각적으로 사용한 문인이었다.
허무해져 퇴폐로 빠진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가진 감각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서정주 시인과 그 결이 같다고 생각한다.
서정주 시인의 작품을 보면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을 정말 감각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도 허무함이 녹아 있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허무주의와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이를테면, 다자이 오사무의 허무주의는 '태어나서 미안하다. 시발, 그러니까 인간답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라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허무함은 '사랑은 영원하다던데 왜 이렇게 무의미해 보일까. 나는 누구이길래 이토록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관점이다.
즉, 다자이 오사무는 허무주의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회의주의인 것이다.
앞서 함께 묶어 소개했던 미시마 유키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인데 그 역시 명필로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냈다.
그는 진정한 탐미주의자로서 그가 그려낸 추악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심미안은 매우 절묘하고 논리적이다.
스승 야스나리보다 더욱 뛰어난 감각으로 아름답게 글을 썼던 청출어람의 표본이었다.
한량, 도쿄를 떠나다
설국은 어느 한량이 도쿄를 떠나 설국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 첫 구절이 문학사에 기록된 명문장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끝자락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일어서 다가오더니,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여자는 한껏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는 듯이,
"역장니임, 역장니임ー"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남자는 목도리를 콧등까지 두르고, 귀에 모자의 모피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한량은 터널을 통해 설국과 현실을 자주 오간 것 같은데 이 문장을 통해 시큰한 추위가 느껴진다.
나 역시 독서를 통해 설국으로의 터널을 건넌 것이다.
그의 이름은 시마무라.
그는 왜 설국을 찾았을까.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가 여행자이기 때문에 설국을 찾은 것뿐이다.
보통, 우리는 여행을 떠나며 대단한 이유를 대려고 한다.
좋은 여행이란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산티아고에 간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다녀오면 가치관이 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걸으러 갔다.
그리고 무엇을 얻었냐고?
아무것도 없다.
그저 프랑스 루트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무리했다는 인증서만 받았을 뿐이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게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부르는 헛수고이며 회의적인 관점이다.
의미를 찾아봐야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두라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딱 그 지점에 선 인물이다.
도쿄와 설국 사이의 경계에 선 경계인이다.
그에겐 도쿄의 의미도 설국의 의미도 희미하다.
게이샤에게는 얼굴이 없다
고마코는 시마무라가 자신을 떠날 것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온천장의 게이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순수한 영혼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여전히 순진한 희망을 안고 살고 있더라도 시마무라는 그녀와 함께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게이샤이기 때문이다.
시마무라는 온천장을 떠나는 즉시 고마코에 대한 생각을 멈춘다.
그래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녀의 사랑을 애틋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고마코에 관하여 부정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래, 작가는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래도, 사랑이 영원한 감정이라고 믿느냐고.
이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격화된다.
유키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배웅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요코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이것은 명확하다.
고마코는 죽은 감정은 치워 버리고 살아 있는 감정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다를 것이라고 믿는 사랑도 현실 앞에선 타협하게 된다는 암시가 강력하게 다가온다.
설국관에 있는 '고마코' 그림
암시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과 재미없는 지점은 동일하다.
그건 바로, 특별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유키오의 죽음은 구경하듯이 지나가고 요코의 투신으로 마무리하는 결말도 시마무라는 방관자가 되어 밀려날 뿐이다.
그렇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뿐 넌지시 말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방관이다.
시마무라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실제로 서양 무용을 보지 않고 사진과 글로만 서양 무용을 논한다.
본인의 직업은 탁상공론하는 일이라고 명시하며 그래서 좋다고 여긴다.
어딘가 내실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쓸데없이 여자나 만나러 온천장에 들르는 한량처럼 한심해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도 열정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긴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방관의 태도이다.
보지 못한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 겪어보지 못한 사랑에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
시마무라는 이러한 태도로 고마코를 사랑하고 요코에게 흥미를 느낀다.
이 열정의 방점 역시 결말에서 절정에 이른다.
2층에서 떨어진 요코를 목격하고 달려가는 고마코를 바라보며 인파 속으로 묻혀 사라지는 시마무라를 보자.
그들이 비극을 눈앞에 두고도 황홀경에 빠진 건 은하수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은하수의 절경을 뒤로한 채, 고마코는 내달리고 시마무라는 뒤로 물러선다.
그래, 그는 어쩔 수 없는 여행자이며 방관자이다.
시마무라에게 에치고유자와는 설국이며 환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
뒤로 물러나면 그만일 '남의 일'일뿐이다.
이제 작가의 암시를 눈치채야 한다.
이 소설은 시마무라의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
경계인의 방관하는 태도로 읽어야 그 맛이 살아난다.
마무리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기차 안과 기차 밖의 경계에 비친 여인의 얼굴에서 허무함을 읽어낸 시마무라의 시선은 작가의 눈을 대신한다.
허무한 것은 인물이다.
그건 인생이고 사랑을 대변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결국 허무해질 것이라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경계에서 삶과 자연의 어우러짐을 지켜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또, 아름다운 건 그저 아름다울 뿐인 것이지 거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읽히기도 한다.
고마코가 시마무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캄캄한 데서 마시는 술은 싱거워요."
그녀는 왜 어두운 곳에서 술을 마시는가.
시마무라와의 재회를 꿈꾸며 손꼽아 세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의미 없는 일에 의미를 만들어 집착하니 그 술이 맛있겠나.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는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이고 '좋은 여자'일뿐이다.
둘 사이의 이러한 결말은 예고되어 있었고 고마코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될 지도 미리 말해주고 있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설국이라는 지명과 생소한 서양 무용에 관한 평론을 쓴다면서 직접 본 적은 없는 괴상한 주인공.
시마무라가 묵는 방에 먼지처럼 쌓이는 벌레들의 사체, 그리고 꿈을 꾸듯 묘사하는 거울 속의 묘사.
온천장 주인의 병든 아들 유키오와 그를 간호한답시고 게이샤를 선택한 고마코.
고마코와 연적 사이처럼 보이지만 신비로워 보이는 요코와 그녀의 투신.
화재 그리고 은하수.
과연 이것들은 사실일까.
작가는 터널을 사이에 두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만들어 놓고 이 설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그렸다.
아마 시마무라가 터널을 통해 여러 차례 설국으로 여행했다는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은유가 아닐까.
그래서 설국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이동을 따라 쓰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작품을 썼을까?
언어의 감각을 극대화해서 몽환적인 일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그랬을까?
아니, 그도 알았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은 하나로 귀결되고 그 답 역시 죽음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을.
밤의 바닥까지 하얘지는 설국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묵직한 침묵 속으로 덮어 버린다.
그리고 허무 속에 잠든 질문은 인간 앞에 아름다운 얼굴로 나타난다.
그러기엔 수많은 질문이 난립하지 않냐고?
괜찮다. 어차피 생은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