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와 현실의 강변에서 나는 묻는다.
당신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현실은 떠다니는 부유물이고 구도는 흐르는 강물이다.
그렇게 부유하다 강변에 멈추었을 때 비로소 단지 삶에 맡겨진 채 떠다니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기분은 어떠한가.
삶이 어떻게 보이는가.
분명히, 우린 서로 다를 것이다.
멈춘 강변의 위치에 따라, 정지한 땅의 점질에 따라, 그리고 우리 자체의 무게에 따라 말이다.
우리가 저마다의 시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다른 사연을 자신의 시야로 해석하며 강물 사이를 함께 떠내려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린 서로 부대끼며 삶을 이어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그렇지만, 서로 다르다 하여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이 물음은 인류의 오랜 화두이지만 확실한 정답을 내린 사람은 없다.
솔직히, 신조차 그 답을 내려줄 수 없을 것이다.
이 불안한 마음은 개인에 최적화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종교에 귀의하거나 수련에 심취하기도 하며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기 싯달타라는 인물을 통하여 누군가는 고민을 털어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자와 성인의 가르침을 통한 구도는 강물의 어느 지점까지 우리를 옮겨줄 것인가.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의 입을 통해 방황에서 깨어나 자아의 성찰을 촉구하더니, 싯달타에서는 구도와 깨달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 다시 독서를 하며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점을 깨달았다.
엄연히 책 속에 '세존 샤아카 무니'라는 구절이 있음에도 주인공 싯달타가 석가모니라고 오해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 독서는 조금 더 정성을 들였는데, 어쩌면 석가가 과거불을 만난 건 아닌지 웃긴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인도에서는 석가가 8번 환생했다고 하니까.
진짜 주인공은 강이다
주인공은 싯달타지만 진정한 주역은 강이다.
싯달타의 구도를 돕고 깨달음을 일깨운 존재가 바로 강이기 때문이다.
강은 무수히 많은 세월을 묵묵히 흐르며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강의 위치도 조금씩 변하지만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니 넘어가자.
강은 수많은 군상을 만나며 모래알처럼 많은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희로애락을 담으며 시간의 저편으로 흘러온 강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 얼굴은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태초 신앙인 대모신처럼 강은 대지를 적셔 생명을 잉태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강의 힘을 빌어 문명을 일궜다.
그래서 싯달타의 정신적 고향은 강이며 그 줄기가 모태이다.
거대한 강은 바다로 흐르고 비가 되어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
그는 살아있음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별개의 것도 아님을 강을 통하여 깨달았다.
그 둘이 동시에 발현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간다.
필멸자로 살아가며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은 생사를 옳게 바라보는 일에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의 기원과 삶의 목적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고단함과 관계가 있으며 누구나 그렇다.
그러므로 삶의 지혜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인간은 저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지혜를 전달할 수 없다'
나는 이 구절에서 멈추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 무조건 정답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험하지 않고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전국시대의 조나라 장군 조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지상담병이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이 장군은 조나라 명장 조사의 아들이다.
책을 모두 외워 지식이 충만하였으나 전쟁의 경험이 전무하였다.
그러나 조괄은 스스로 자타공인 병법가로 자부하며 진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이 바로, 유명한 장평대전으로 조괄이 패하면서 조나라 병사 45만 명이 땅에 산 채로 파묻혔다.
이것은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모든 것을 일반화할 필요는 없다.
좁은 식견에 함몰된 결과물은 가짜 지혜이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볼 수 있는 무늬만 어른인 성인들이 바로 그러한 부류이며, 그들에게서 교양이 담긴 언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말이야 말로 참뜻을 훼손하는 수단이다'
이 구절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말이 많아지면서 실언이 늘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많이 하였다.
그래서 침묵의 값진 가치를 알아가고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믿음을 심어준다는 진리를 나이를 먹어가며 깨닫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20대 때부터 받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저지른 숱한 과오와 유치한 짓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좋은 책은 우리에게 질문을 내리고 깊은 사유는 질문을 확장하여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이 싯달타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구도와 현실이라는 질문을 받아 유지와 변화라는 무쌍한 삶의 얼굴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게 해 주었다.
이제 이 평온함을 오래 견지하는 태도만이 남았다.
강은 바다로 흘러가 거대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을 걷어내고 본질을 바꾼다.
형태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속의 근원은 분명 다르다.
우리도 삶이라는 체계 안에서 자아를 확장하여 종국에는 나를 다시 비워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화두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을 구도라는 거창한 단어로 표현하는 건 거추장스럽다.
적어도 생과 사라는 순환 아래에서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변화는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삶 그 자체로 순환의 하나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고하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 온통 변하는 것 천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격언은 나만이 홀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형태는 새로울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근본은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중심이 될 나라는 자신을 단단하게 여며야 한다.
오로지 나의 동의에서, 나의 흔쾌한 승낙으로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글을 쓰며 화두를 확장한다.
생生은 죽음死보다 짧다는 것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