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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Dec 03. 2023

부조리한 보상 안의 삶

스토너

언젠가 매우 길었던 하루를 기억한다. 

무언가 벌어졌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무슨 일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날 체감한 감정은 깊이 새겨졌는데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이었고 참담한 실패였다. 

그래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하루는 길고 인생은 짧다는 것을. 

스토너의 첫 줄은 건조하고 담담하게 시작한다. 

그가 1910년에 미주리 대학에 입학해서 조교수를 하다 1956년에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엔 중요한 대목이 슬며시 들어가 있는데, 누구도 그의 이름을 중요하게 기억하지 않았고 노교수들조차 노쇠한 자신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추억거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 구절이다. 

대부분의 삶이 이렇다. 

나 역시 그렇게 잊힐 것이고 가족조차 그들의 추억거리에 들러붙은 작은 스티커로만 떠올릴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밝혀주는 도구로만 쓰이게 될 것이지만 불만은 없다. 

애초에 나도 타인의 죽음을 그렇게 기억하니 말이다. 

스토너의 삶은 평범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직업을 갖기 위하여 배웠으며 자신이 생각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맞닥뜨리는 삶의 불행을 조금씩 꺼내 보인다.

죽는 순간까지 평범했던 스토너의 이야기는 삶의 권태로움을 읊조리고 있지만 속내는 다르다. 

그것은 삶의 부조리이며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인생의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진실이다. 

한 번의 행복을 위하여 아홉 번의 좌절을 겪어야 하며 어렵게 얻은 행복 역시 오래 지속한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불행함을 몰고 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스토너가 삶을 바꿀 만한 변화를 만들지도 않는다. 

고작 하는 것이라곤 작은 저항이나 수긍 후에 찾아오는 자괴감을 발현뿐이다. 

그래, 이게 진짜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본의 성공과 부(富)는 현대사회의 시대정신이자 새로운 어젠다가 되었지만 화려함은 특수한 사례일 뿐, 삶의 진짜 현상은 선택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물에 있다. 

특히, 스토너는 부조리에 맞서지 않은 대가로 삶의 에너지원을 놓쳤으니 그 자체로 부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일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했는데 그것을 현상으로 해석했으니, 그 담백하게 표현이 참으로 건조했다.

거기엔 약간의 기쁨을 제외하고 온통 잿빛의 나약함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작품이 두 권 생각났는데, 스토너만큼 차갑고 건조하진 않았다. 

'생의 한가운데'는 무지몽매함의 대가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고 '자신의 생 앞에서'는 먹고사는 일의 서글픔이 시대와 맞물려 있어 어떻게 보면 뜨겁기도 하였다. 

아마, 내가 이러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스토너가 묘사하는 인생이 가장 삶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인생을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부조리의 연속 발생과 합리적이어야만 하는 선택의 자연 생성은 어울리지 않는 조재이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감정에 휘둘리고 만다.

삶이 그렇게 돼버리면 고통스럽다.

그래, 나는 그래서 스토너가 지독하다고 생각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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