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아마도 세상의 유명한 고전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으로 서막을 알리는 도입부라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뫼르소라는 인물과 그가 느끼는 세상과의 괴리를 정말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아니, 대체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이런 생각을 하는 뫼르소야말로 부조리한 인물이다.
우리가 인정하는 보통 도덕률에 반하는 부적응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자.
뫼르소라는 인물은 왜 나타났는가?
어째서 그는 부조리한 처우에 반대한다며 우리를 부조리한 사람으로 내모는 걸까.
성격파탄자라서? 사이코패스라서? 혹은 그릇된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서?
어쨌건 정답을 말하기는 어렵다.
온갖 이유를 떠올릴 수는 없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그것.
카뮈는 그것을 부조리라고 부른다.
혹시, 당신은 이런 경험이 없는가?
일상의 어느 날, 사람으로 가득 찬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스스로 물어본 적이 없나?
혹은, 군대나 직장, 어쩌면 학교에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고 허전한 감정을 느낀 적은?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이런 순간에 대면한다.
그렇지만 적당한 핑곗거리만 나열할 뿐, 진짜 이유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허전한 마음이 들고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부조리는 삶에서 우리가 겪는 사건과 상황에 대하여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잔인해진다.
사유를 찾기 위해 분주해지기도 하지만 곧 그 행위에 대하여 의미를 잃어버린다.
부조리는 이제 허공에 부르짖는 메아리처럼 대답 없는 질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부조리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무기가 있을까.
1. 죽음, 혹은 자살
아주 분명하게 부조리를 소멸할 수 있으나 나 자신조차 사라진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그렇지만 뫼르소는 자살에 대해선 아예 시도조차 않는다.
다만, 그가 죽음을 처연하게 받아들이는 점에서 결국 스스로 부조리를 소멸하여 환희에 찬 인간으로 죽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 종교나 연애
적어도 카뮈는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뫼르소의 어머니는 무교였으며 뫼르소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는 현재 살아 있는 삶을 초월하여 의미를 주지만 결국 현실을 배신하는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이라는 거창한 존재는 사실 부조리를 가리기 위하여 만들어 낸 공허한 관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연애 역시, 쓸모없는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뫼르소는 마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에겐 정욕과 같은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욕구가 있을 뿐, 결혼이나 사랑에 대해선 고려하지 않는다.
연애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도망가는 피난처일 뿐, 결국 삶을 직시하려는 시선에서 보자면 또 다른 부조리인 것이다.
3. 삶을 받아들임
그럼,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부조리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것은 삶을 받아들이고 부조리에 대응하는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라는 말처럼 내 앞에 주어진 삶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조리를 버텨내고 삶을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
카뮈는 이렇게 부조리를 직시하며, 반항, 자유, 열정을 이끌어 냈다고 말한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하여 죽음만이 결말이었던 삶에 새로운 법칙을 심어 놓는 것이다.
그래,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바꿔 생각하면 삶 역시 필연적이다.
피할 수 없다.
카뮈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 절망하기보다는 생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뫼르소는 주변에 무관심하다.
과거에 대하여 반추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
마리와의 결혼보다 당장 데이트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사람들이 뫼르소에게 어머니의 장례식에 대하여 물어보면,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라며 속내를 드러낸다.
이 부조리한 사실이 나와는 별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뫼르소는 말하고 싶어 한다.
살라미노 영감과 잃어버린 스패니얼 개, 레옹의 무어인 애인 모두 부조리에 해당한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의 사건은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뫼르소는 이들을 관찰하며 자신이 맞닥뜨린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자신을 찾아온 사제를 내쫓으며 능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삶을 완성한다.
이것이 카뮈가 주장한 뫼르소의 음화(陰畫)에 해당한다.
따라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로 ‘태양’을 거론한 이유가 확연해진다.
부조리한 사실에는 아무런 타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뫼르소로서는 너무나 솔직하게 답변한 것이었다.
아랍인은 자신을 위협했고 태양이 반사된 빛에 그를 사살하였다.
예심판사는 뫼르소의 행실에 불만을 표현했고 검사는 ‘어머니를 매장한 차가운 마음으로 아랍인을 사살’하였다며 사형을 구형한다.
살인에 사형을 구형하는 것이 응당 당연해 보이지만 구형 이유가 부조리하다.
판사 역시 검사의 손을 들어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자신의 사형장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자신을 향해 야유를 해주길 바란다.
그 거대한 야유야 말로 뫼르소의 방향이며 자유에 해당한다.
카뮈는 뫼르소의 죽음을 통하여 부조리에 반항하자는 은유를 색칠한 것이다.
이방인을 읽으면서 고민했던 다른 것들을 보자면, 총 다섯 발의 사격, 간호사의 말 등이다.
뫼르소가 감옥에서 떠올리는 레몽과 친구, 해수욕장, 싸움, 바닷가, 작은 샘 등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총 다섯 발의 사격은 어떨까.
일단, 뫼르소가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관계적 이방인이 정치적 이방인을 사살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 발이든 네 발이든 어차피 죽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데 쓸데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세태를 조롱하는 것인가.
그리고 태양과 뜨거운 공기, 끈적한 땀이라는 표현은 실존과 본질이라는 경계로 읽힌다.
태양이 본질이고 공기와 땀은 실존이다.
태양이 절대적 가치나 권위라면 그것으로 인하여 촉발된 살인은 부조리를 바라보는 카뮈의 시선을 보여준다.
더는 그러한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뫼르소가 감옥에서 떠올린 간호사의 말은 무엇일까.
정확한 대사로 다시 떠올리지는 않지만, “천천히 걸으면, 일사병에 걸릴 위험이 있어요. 하지만 너무 빨리 걸으면, 땀에 젖고 교회에 들어가서 오한에 시달리죠.” 이란 구절 같다.
어째서 뫼르소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이 말을 떠올렸을까.
적막한 감옥 생활이 무엇을 생각나게 한 걸까.
이 질문은 다음에 다시 한번 다뤄야겠다.
이렇게 이방인의 감상이 끝났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와 데미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최고의 문학으로 꼽는다.
어떤 출판사, 어느 번역가를 통해서건 여러 번 읽을 가치가 있는 명작들이다.
특히, 요즘처럼 방황하는 영혼들이 온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시대라면 반드시 이러한 고전을 읽어야 한다.
내가 온전한 나로서 스스로 서는 일은 견식도 중요하지만 대문호의 시선을 통해 끊임없이 사유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내 삶을 어떤 방식으로 걸어야 굳건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