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모두에게 통용되진 않지만 누군가에겐 인생을 흔들어 놓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영화일 수도, 한 권의 책일 수도, 한 명의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매개체가 아니라 어떻게 마음을 뒤집어 놓았는지, 왜 마음이 끌렸는지 하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은 본인만이 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사유의 근원을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만나서 마음이 동動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야간열차에 탑승할 수 있겠는가?
선택에 대하여 말을 해볼까
인생은 무궁무진하다는데 도대체 그 가능성들은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통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 마당에 묻혀 있는 건지, 거실 소파 위에서 늘어진 낮잠을 자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사무실 서랍의 어느 곳에 틀어 박혀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대신 우린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이란 가능성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데, 우린 무엇을 근거로 선택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신념, 사상, 종교 등의 거창한 사유가 필요한 것보다 나에게 상대적으로 이로울 선택을 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 삶은 생각보다 더욱 사소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선택하는 일도 잦다.
리스보아의 고결한 귀족 출신이자 명망 있는 판사의 아들인 아마데우 프라두는 시민에게 도살자라고
불리는 멩지스를 살리기 위하여 그의 심장에 아드레날린을 주사한다.
독재를 저주하고 독재자를 돕는 이들을 모멸한 프라두가 죽어가는 멩지스를 살린 것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까.
의사라는 직업의 소명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측은지심으로?
절대로 다른 선택과 상대적으로 이로운 선택이 아니다.
프라두의 어깨에는 그가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그림자가 무겁게 매달려 있다.
그 그림자는 자신의 아버지, 아마데우 판사이며 그를 향한 연민과 증오가 족쇄처럼 프라두의 인생을 따라다닌다.
그의 선택은 자의적이라기보다 만들어진 것이다.
프라두는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증오하는 아버지의 척추 경직을 동정하며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처럼 혐오하는 멩지스를 살리려 있지도 않은 소명의식을 꺼낸다.
그는 타인이 규정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프라두는 조르지를 좇아 레지스탕스에 합류한다.
독재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라니, 드디어 프라두가 독재에 항거하고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걸까.
아니다.
아드리아나와 멜로디가 학습된 주체성을 자신의 독립적인 사유의 결과물로 착각하듯 프라두는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사람들 때문에 레지스탕스에 합류한다.
다만, 프라두는 자신의 여동생들처럼 착각하진 않았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그는 자신의 저항이 독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비난을 향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속죄이든 변론이든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존재는 거울로 자신을 의식하고 타인으로 나를 인식한다.
그래서 내가 나로서 온전하지 않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사회가 규정한 대로 살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고 오해하듯 인생의 가치관을 온전히 나 스스로 정했다고 오판한다.
프라두는 그 진실을 깨달았다.
그랬으니 에스테파니아에게 아마존으로 떠나 안빈낙도의 삶의 살자고 제안했겠지.
나를 규정할 시스템이 없는 곳. 적어도 자연이라면 나를 어떻게 규정하든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일 테니.
그러나, 욕망 가득한 메시지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즉, 내가 타인을 규정지으려 하면 그는 그의 권리로 저항한다.
프라두의 말 그대로다.
그러하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법칙이 하나의 현상이라면, 성찰은 하나의 의무다.
잊지 마라. 그레고리우스는 돌아왔다.
고리타분한 일상을 보내던 그레고리우스는 소나기처럼 만난 여자를 만나 충동적인 여행을 계획한다.
그 여행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지은 '아마데우 드 프라두'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리스보아는 혁명이라는 필연이 일어난 곳이며, 그레고리우스가 우연히 여행한 장소이고 그가 반드시 떠나야 할 여행지이다.
돌아가야 한다는 운명은 우연히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충동적으로 저지른다고 하여도 이성적으로 뒤를 수습해야만 한다.
하기 싫다고?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건가?
마음이 경천동지 할 일을 만나 삶을 송두리째 바꾸겠다고 해도 새로운 일상이 될 뿐이다.
결국엔 나로 돌아와야 한다.
자아의식을 확립했다면 순환의 가치에 대하여 깨닫고 내가 나로서 가져야 할 윤리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는 다르다.
그레고리우스는 홀린 듯 프라두의 생을 따라가지만, 그것은 나를 찾는 여행이다.
프라두를 찾아 탑승하는 야간열차는 인생의 짧은 축약이다.
프라두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의 삶은 타인의 시선이 향하는 대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존재는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지어진 개념에 불과하였다.
프라두는 우연을 사랑하고 아주 작은 충동심, 아주 짧은 순간, 아주 특이한 우연으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프라두는 자신은 우연이 향하는 방향으로 걸었으며 그 결과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궁금하다.
프라두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인과관계를 말하는데, 독립변인이 우연이면서 어떻게 필연적인 연결을 경험했다는 말인가.
결국, 이 모든 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그저 사람이 두 개의 독립적인 사건을 두고 연결고리를 묶는 심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수많은 현상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리고 모든 현상은 가능성이다.
다르게 말하면, 프라두는 가능성을 우연의 연속으로 보았고 그레고리우스는 가능성을 현실에서의 실현으로 보았다.
그래서 프라두는 떠나려고 했고 그래고리우스는 돌아왔던 것이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보아를 다녀온 여정 끝에 이렇게 인생을 정의한다.
프라두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현재라는 작은 부분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고결한 무언가를 이끌어 낼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을 물리세계가 아닌 가능세계로 정의하겠다는 의도이다.
결국, 인생은 언어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며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은 물리세계이다.
인생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루어졌더라도 물리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실현된 것이다.
즉, 일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이 소설은 리스보아 여행기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화두이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
어차피 이 화두에서 중요한 건 나라는 존재이고 마음이다.
그러니, 그레고리우스의 생활이 변할지 아닐지 궁금하지 않다.
내가 야간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과연, 나는 나를 규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