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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21. 2020

아독 선장이 누군지 몰라서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32

4월 20일(격리 36일째) 월요일 흐림


장 보러 다녀오는 날은 종종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하지 말라고 한다.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것을 사서 장에서 오자마자 바로 먹으면 아내가 아이들 넷과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오늘은 오븐에다 10분 정도 구워서 먹을 수 있는 피자를 두 판 사 왔다. 그 슈퍼마켓에서 산 피자 위에 모자렐라와 쉐브르, 에멘탈 등 여러 가지 치즈를 더 얹으면 꽤 두꺼운 피자가 된다. 캬트르 프로마주(4개의 치즈)를 샀는데 거기에 세 가지를 더 얹었으니 7개의 치즈네, 라고 아재 개그를 던졌다. 아내는 우리가 따로 넣은 치즈 종류도 원래 있던 4개에 들어가는 치즈일 걸, 한다. 오늘따라 일찍 점심을 마친 넷째는 재우고, 다섯 이서 식탁에 둘러앉아 피자를 먹었다. 


첫째와 나는 주로 한국어로 대화를 한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왜 그 단어가 내 입에서 나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건너편에 앉은 첫째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뭐라고?”라는 말을 하게 됐다. 그리고 몇 번을 반복했다.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아마 두 아들놈들이, 특히 말이 많은 셋째가 내 옆에서 시끄럽게 해서였을 것이다. 나의 3 연속 “뭐라고”를 듣자 아내가 말했다. 


아내 : 물 아 고프르? 물 아 고프르? 꼭 물 아 고프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둘째 : 아독 선장이 하는 말? 
첫째 : 땡땡에 나오는 그 선장? 
아내 : 그래 맨날 뭐라 뭐라 하면서 물 아 고프르 그러잖아. 


점심 식사에서 오가는 대화는 나의 세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물 아 고프르(Moule à gaufres)’는 와플 기계에 들어가는 틀을 뜻하는 말인데, 프랑스의 유명 만화인 <땡땡의 모험>에 나오는 다혈질 아독 선장이 열 받았을 때 내뱉는 여러 욕설 중 하나다. 단어의 원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제기랄, 젠장, 빌어먹을 등으로 이해하면 되는 숙어 같은 단어다. <땡땡의 모험>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만화 주인공 땡땡을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아독 선장의 캐릭터를 모르면 안 되는 경우다. 저걸 이해하기 위해 아내에게 몇 번을 꼬치꼬치 물어야 했다. 


종합병원의 간호사인 아내의 막내 이모는 아들이 넷이다. 막내 뤼도빅이 우리 첫째와 다섯 살 차이가 난다. 지금 고등학생인데, 나는 뤼도빅이 다섯 살 때 그 녀석을 처음 봤다. 파리 시내에 살던 신혼시절 우리는 주말이면 파리 외곽의 막내 이모 집에 종종 놀러 가곤 했었다. 막내 이모는 아내를 많이 예뻐했다. 동생이 없는 이모는 아내를 동생처럼, 언니가 없는 아내는 이모를 언니처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집에서 나는 주로 뤼도빅이랑 놀았다. 다섯 살짜리와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는 불어를 유창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뤼도빅은 지금도 나를 좋아한다. 그때 나는 뤼도빅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도 몇 년 지나면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하겠지.”


나는 우리 아이들과도 그런 순간이 올 것으로 염려하고 있다. 식탁에 둘러앉아 모두가 대화를 나누는데 나만 못 알아먹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순간 말이다. 오늘 점심은 그 전조를 보는 것 같아 섬뜩했다. <땡땡의 모험>은 우리나라로 치면 <아기공룡 둘리>나 <태권브이> 같은 거다. 그 역사나 마니아 층의 충성도는 <땡땡의 모험>이 월등하지만,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고 어린이 문화를 모르면 둘리를 알기 어렵듯, 프랑스 초중고교 시절을 관통하는 대표 문화 중 하나가 땡땡의 존재라는 점에서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땡땡의 열혈 마니아가 되지 않는 한 나는 오늘 점심의 대화에 절대 낄 수가 없다. 그런데 프랑스 만화는 글자가 너무 많다. 


나의 꿈은 아이들과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말해왔고, 지금도 그 꿈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말도 잘 안 하려고 하는 아이들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얼마 전 누나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자형의 생일에 “사랑하는 아빠에게”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를 전달하는 모습의 사진을 대화방에 올렸다. 부러웠다. 조카는 게다가 글씨도 또박또박 잘 쓴다.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불어를 사용하면서 일상생활을 이어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지만, 프랑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오랫동안 여러 가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지만, 상점이나 공공기관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나 문자로 항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곧잘 한다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 이방인일 뿐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2등 시민이다. 구직활동을 하더라도 내가 한국에서 찾는 구인공고와 여기에서 찾는 구인공고의 종류는 다르다. 


하지만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나를 절망에 빠지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순간 더 힘든 일상을 보내게 될 확률이 크다. 이방인도 오래 하다 보면 할 만하다.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나는 내가 이방인이든 2등 시민이든 나를 믿어주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지 않은가. 거짓말처럼, 저녁 시간이 되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가 첫째의 방에서 나오면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내게 카드를 불쑥 건넸다. “나의 정말 친애하는 부모님께”로 시작하는 첫째의 편지였다. 그냥 사랑하는 마음에 썼다고, 당신들은 나의 가장 훌륭한 기준이며 나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등대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불어로. 한글 편지 같은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꿈은 안 이뤄졌을 때 더 간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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