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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엥 Oct 12. 2021

코로나 이후 다시 프랑스 -역사

밀레는 대표작 <만종>으로 정말 혁명을 꿈꾸었는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모나리자>라면,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대표하는 그림 중 하나는 바로 밀레의 <만종>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만종>은 그의 나이 43세이던 1857년부터 1859년까지 2년 간 그린 그림으로 밀레는 ‘농부들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프랑스 시골의 가난한 농부들과 목동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던 전원화가였다.  

   그러나 밀레가 그렸던 농촌의 삶을 배경으로 한 많은 그림들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회주의자들로부터는 많은 지지와 찬사를 받았고 반대로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몰리기도 했다. 밀레가 받았던 정치적인 비판은 한 마디로 그가 농촌의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다. 

   밀레는 35세인 1849년 정치적 혼란의 중심지인 파리를 떠나 근교인 퐁텐블로 숲속의 아름답고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Barbizon)에 정착해 살았는데,  밀레를 중심으로 바르비종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을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라고도 불렀다. 19세기 중반 당시 프랑스의 보수 기득권자들은 밀레가 그린 <만종>외에도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사람들>같은 그림들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선동을 하는 그림이라고 의심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밀레의 <만종>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전시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렇다면 그는 정말 자신의 대표작인 <만종> <씨 뿌리는 사람> <씨앗 줍는 사람들>등을 이용해서 새로운 혁명을 꿈꾸었는가? 밀레가 아름다운 농촌 풍경과 농부들의 모습을 경건하고 숙연하게 그린 그림 속에는 정말 기득권 보수정부를 뒤집길 바라는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들어있는가? 

  밀레의 <만종>은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이지만 그가 이 그림을 처음 그렸을 당시, 프랑스의 모든 사람들이 이 그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종>을 보면 가난한 농부부부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 보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숙연해지고 엄숙하게 만들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누군가는 이 그림을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싫어했던 것이다.  밀레가 <만종>을 그렸을 당시 가난한 사람들과 평범한 프랑스인들은 이 그림을 좋아했지만 당시 프랑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제2제정 세력들은 밀레가 그린 이 그림이 당대 프랑스 제2제정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고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밀레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프랑스 민중들에게 무언가 특별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려 했고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밀레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그는 다양한 형태로 이미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의 정치참여를 거부했었다. 체제 전복과 불순한 의도로 혁명에 대한 정치권의 의심을 받던 <만종>에 대한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만종>은 옛날에 농촌에서 밭일을 할 때 만종이 울리면 고된 일을 잠시 멈추고 모자를 벗어 들고 가엽게 죽은 자들을 위해 경건하게 삼종기도를 올리게 하셨던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면 밀레는 정말 자신이 그렇게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프랑스 현실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냥 평범한 농촌풍경만 그렸던 화가였는가? 사실 밀레의 일생에는 특이한 이력이 있기는 하다. 밀레 자신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던 평소의 언급과는 달리 나중에 사실주의 그림의 대가였던 귀스타브 쿠르베와 함께 1871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자 노동자 정권이었던 파리코뮌의 한 일원이 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밀레는 정말 자신의 작품으로 혁명을 꿈꾸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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