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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엥 Sep 24. 2021

코로나 이후 다시 프랑스 -역사

단두대(기요틴 guillotine)가 평등의 산물이라고? - 2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국가의 중요사항을 결정할 때 궁궐 안에서 귀족들을 중심으로 먼저 논의되고 마지막에 국왕이 결재를 하면 시행되는 방식이었는데 인권선언 이후에는 국가 정책의 결정은 반드시 국회의 논의를 거쳐야만 됐다. 이런 엄청난 변화는 비단 국가정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사형수들을 처형시키는 방법에도 변화를 초래 했다. 즉 대혁명 이전에는 같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계급과 신분에 따라 차별적인 사형방법이 쓰였다. 즉 신분에 따라 동일한 죄목이어도 예를 들면 귀족에게는 칼로 목을 자르는 참수형, 일반인에게는 굵은 줄로 목을 매다는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차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률에서 보장하는 인간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차별적인 행동이었지만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기요틴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잔인한 방법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법으로 인간의 평등이 선언된 이상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를 불문하고 처형방법은 동일해야 한다는 평등적이고도 긍휼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 사형방법이 필요하고 과거의 야만스럽고 잔인한 방법은 인도적 방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두대를 만든 기요틴 박사의 생각에는 비록 죽을 죄를 지은 사형수라도 고통을 최소화해서 죽이는 것이 곧 모든 인간에 대한 평등하고 인도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과거처럼 사형집행인이 칼을 써서 죄수의 목을 자르면 변수가 많았다. 사실 과거의 사람들은 ‘참수‘가 인간의 고통을 가장 최소화하고 단번에 처형을 끝내는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죄수에게나 참수를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장 인도적이고 죄수에게도 편한 처형이 참수라고 생각했기에 신분제 사회에서는 귀족 이상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참수가 허용됐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교수형을 당한 죄수의 가족들은 세상 사람들의 많은 멸시를 당해야 했지만, 참수형으로 처형당한 죄수의 가족들은 이러한 세상의 멸시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모든 죄수들이 자신의 죽음이 참수형으로 결정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특혜는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처형방법에도 중요한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사형 집행인의 몸 컨디션에 따라 혹은 죄수가 몸을 얼마나 움직이느냐의 여부에 따라 단 칼에 목을 자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죄수의 고통은 극에 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비인도적이고 야만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처형대 근처에서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죄수를 욕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사형집행인이 단번에 죄수의 목을 자르지 못해서 죄수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면 죄수에게 향했던 분노와 비난이 사형집행인에게 가게 되고 결국은 사형을 언도한 당국에게 까지 가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형집행인의 처형기술이 중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처형대 근처에는 죄수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죄수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숙했던 사형집행인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던 예가 리옹지방(Lyon)에서 1793년 발생 했다. 1793년 7월17일, 파리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던 혁명지도자 조제프 샤리에(Joseph Chalier)의 처형이 있었다. 사형집행인인 리펠이 단칼에 그의 목을 자르지 못해서 세 차례나 칼을 휘둘렀고 채 목이 완전히 잘리지 않은 샤리에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걸 지켜보던 군중들 중 샤리에를 따르던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날 군중들의 흥분은 폭력적인 소요사태로 번지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이처럼 사형집행인이나 죄수의 상태에 따라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없앨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변수를 없애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한 사형집행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인간의 평등과 죄수의 인권을 생각한 필요성과 논리에 의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단두대, 즉 기요틴 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요틴을 이용해서 죄수의 목을 단 한 번에 깨끗하게 자른 다음부터는 죄수의 잘린 머리를 군중들 앞에 높이 들어 보여주는 새로운 관례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기요틴이야말로 보기와는 달리 대혁명의 산물인 인권선언과 특히 선언 제1조와 제6조의 핵심인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기본 정신에 가장 잘 부합하는 처형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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