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정하는 시 12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빡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원문에서 일부 발췌)
박노해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2018년 여름 부암동에 갔다가 우연히 시인의 사진전이 열리는 카페로 들어갔을 때였다. <<참된 시작>>, <<노동의 새벽>>, <<다른 길>>,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이전 시집의 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시인 이기전에, 노동자이고 혁명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가장 처참하고 참혹한 풍경에서 울부짖는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며 가슴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시의 언어로 생생히 담는다.
독재정권 시기,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가 넘게 발간된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는 박노해 시인을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며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해 체포됐다가 고문 끝에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1998년 석방됐으나,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어 전 세계 가난과 분쟁의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 온 박노해 시인. 흑백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모아 2010년 첫 사진전 <라 광야>, <나 거기에 그들처럼>을 열고, 12년 만에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이런 시인의 배경 위에 합쳐진 전쟁, 삶과 죽음, 선과 악, 가난, 눈물의 이미지는 모여 모여 중첩되고, 그 가운데서 찾으려는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가 시로 완성된다. 어둠과 절망뿐인 것 같지만, 세계의 끝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밥 짓는 냄새,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 양을 몰다가 앉아서 쉬는 남자의 미소 같은 모습 속에서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삶의 많은 부분이 급격히 변화하고 전염병의 위험 속에, 다음 희생양이 누가 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내가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만연한 현재 우리의 모습에 시사점을 던진다.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등불로 서 있을 누군가만 있다면, 끝끝내 꺾이지 않는 최후의 한 사람만 있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 과연 누가,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될 것인가. 삶은 기적이고, 인간은 신비이며, 희망은 불멸이라는 시인의 위로가, 우리에게 사라지지 말라고 따뜻하게 말 걸고 있다.
2년 전 내가 갔던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제목은 <올리브 나무의 꿈>이었다. 이스라엘이 거대 분리장벽을 세워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고, 그 사람들을 내쫓은 지 70년. 성경의 배경이 되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평화의 상징이 되는 올리브 나무는, 지금도 풍요로운 열매와 기름을 내어주며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인하게 자라고 있다. 그 나무 아래 기대앉아 있는 소년의 사진은 지금도 나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세계가 악에 지배당하고 어둠 속에 내몰려도, 희망의 세계를 꿈꾸고 기대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시인의 말대로 희망은 불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