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정하는 시 14
드라마
이장욱
행인 1이 지나가자
클라이맥스가 시작되었다.
의미심장하게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처음 보는 주인공.
이장욱 씨 맞으시죠? 여기 싸인하세요.
나는 엑스트라 2로서
핀 조명을 향해 걸어갔네.
세계의 가로수들을 이해할 것 같아.
선풍기가 돌아갈 때 선풍기의 배경이 하는 일을.
허공이 음악에게 하는 일을.
누군가 결정적으로 희박해지는 순간에
우연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을.
엑스트라 3에게는 그것이 전 세계.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같은 것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 것
핀 조명이 꺼질 때까지 널 사랑했는데
그것은 행인 4의 사랑.
먼 후일
택배기사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극적인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이장욱 시인의 <드라마>라는 시를 한 편 더 소개해볼까 한다. 시집 <<생년월일>>에 수록된 시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의 내용은 한 편의 드라마를 찍는 상황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나가는 행인 1, 초인종을 누르자 나온 엑스트라 2는 바로 이장욱 시인 자신이다. 엑스트라 3은 가로수와 선풍기와 허공, 음악을 통해 전 세계를 이해한다. 행인 4는 핀 조명이 꺼질 때까지가 유효기간인 슬픈 사랑을 했다.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좋아하는 음악이 방 안 가득 퍼질 때의 짜릿함, 가을이 되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물든 가로수를 보며 한 번이라도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뭔지를 생각해 본 사람은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산다는 건, 누구나 자기만의 드라마를 찍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삶을 엿보고, 체험하고, 동경하지만 사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잊고 사는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지금까지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읽은 책, 들었던 음악, 자주 했던 체험, 가장 기뻤던 순간, 외로웠던 순간, 고통스러웠던 순간, 슬펐던 순간들이 모두 합쳐져서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이미 만들어냈고 지금도 써가고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한 세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그 세계를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사람들이 집에서 쇼핑으로 물건을 사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택배 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배달할 물건들이 살인적으로 많아지고 덩달아 노동의 강도가 세지면서 과로사로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젯밤에 주문한 물건이 새벽 배송으로 총알같이 도착하는 편리한 세상. 그 이면에, 밤잠을 줄여가며 좁은 트럭 안에서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이 동네 저 동네 부대끼며 움직이는 고된 삶을 사는 어느 택배 기사를 생각한다. 적어도 그의 드라마 안에서는 그가 제일 잘 나가는 주인공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잊혀질 수도, 희미해질 수도 있지만 나의 삶은 분명 존재했고, 누구나 인생에서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면 이미 훌륭한 드라마 한 편을 완성한 거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이고 단순한 순간에도 극적인 드라마가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