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정하는 시 15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를 오랜만에 읽어 본다. 워낙 유명한 시라 부연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명작은 몇 백 번을 곱씹어도 언제나 감동이 있기 때문에 소개를 안 할 수가 없다.
잠깐 시인 소개를 해본다. 황지우 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이자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수재이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꾼 시인'. 그에 대한 한 줄 평가로 가장 적합한 문장이 아닐까. 정치성과 종교성, 일상성이 그의 시 세계에 골고루 들어 있다는 측면에서, 삶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한 진정한 미학가라고 생각한다.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게눈 속의 연꽃>>이라는 그의 1991년 발간 시집에 수록돼 있다. 그 외 대표 시집으로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그 설렘을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이 세 연으로 다 표현했다. 온갖 정신이 집중돼서 문이 열리는 소리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마다, 심지어 나뭇잎 소리 하나에도 반응하고 있다. 당신은 가슴이 아리다는 말을 이해하는가? 그 말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대는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본 적이 있는 멋진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망설여지는 이유도 이런 연유 같다. 그게 얼마나 속이 타들어가는 일인지 알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주는 데 서툴러진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 때문에 정말 소중한 사람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결국 '나'는 기다려도 계속 오지 않는 그 사람에게 찾아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그런 나에게 너는...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오고 있다. 나와 똑같이, 아주 먼 데서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그리운 너에게 이미 가고 있다. 마음이 깊어갈수록 그리움도 깊어만 간다.